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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 (목)

19세기 뒤흔든 철도가 21세기에도 질주하는 비결… 혁신 또 혁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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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100년 혁신의 주역 철도, 굶어죽는 사람 줄고 도시 확장

전국 연결해 국가통합에도 기여… 철도 우열 따라 전쟁 승패도 갈려

조선일보

철도의 세계사

크리스티안 월마 지음배현 옮김|다시봄
540쪽|2만5000원


철도는 19세기 100년 동안 세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철도의 직접적 효과인 이동시간 단축이 가져온 변화와 비교할 때, 자동차와 비행기가 20세기에 한 일은 '개선'에 불과하다. 영국의 철도 전문 저널리스트인 저자는 '레일 위를 달린다'는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일으킨 거대한 연쇄반응의 현장으로 독자를 데려가 혁신이 지닌 위력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변화가 시작된 곳으로 저자는 1830년 영국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 개통된 철도를 꼽는다. 그때까지만 해도 증기기관은 말과 경쟁하는 초라한 신세였다. 도로는 물론이고 레일 위에서도 말이 차량을 끌었다. 이때 등장한 이가 증기기관차의 아버지 스티븐스다. 그는 평균 시속 22㎞, 최고 시속 48㎞라는, 당시로는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증기기관차를 선보이며 말과 기관차 사이에서 망설이던 철도회사 임원들을 사로잡았다. 이후 철도의 확산은 '삽시간에 퍼져 나가지 않으면 혁신이 아니다'라고 웅변하는 듯하다. 그로부터 단 10년 만에 증기기관차가 유럽 전역에 퍼졌고,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무려 100만㎞에 이르는 철도가 세계에 깔렸다.

확산 속도만이 혁신의 증거는 아니다. 식품이 대량으로 빠르게 운송되면서 굶어 죽는 사람 수가 획기적으로 줄었다. 장거리 출퇴근이 가능해지자 도시가 확장됐다. 우유를 마시기 위해 시내에 농장을 짓고 젖소를 키우던 뉴욕 시민들은 1841년 뉴욕~이리 구간 철도가 개통되자 악취의 온상이던 농장을 폐쇄했다. 싱싱한 생선이 도심 마트에 등장한 뒤 해안 마을 음식이었던 피시앤드칩스가 영국 대표 메뉴로 부상했다.

조선일보

철로를 달리는 열차포(왼쪽 사진)는 이동 능력은 좋았으나 방향 전환이 어렵고 반동도 제어하지 못해 오래 쓰이지는 못했다. 도로포장 기술이 발달하기 전엔 선로 위를 달릴 수 있도록 바퀴를 개조한 차(오른쪽 사진)가 쓰이기도 했다. /다시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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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철도를 반긴 것은 아니다. 프랑스 문인 공쿠르는 "너무 심하게 흔들려 생각에 집중할 수 없다"고 불평했고, 영국에선 "시속 48㎞를 넘으면 사람이 숨 쉴 수 없다"는 괴담이 유포됐다. 미국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1825~1829 재임)는 볼티모어~오하이오 철도와 체서피크~오하이오 운하의 착공식이 동시에 열리자 운하 착공식에 참석했다.

철도는 운하 소유주, 교량 건설사, 증기선, 역마차 등 온갖 기득권과 맞서며 성장했다. 청나라 관리들은 "농부와 광부, 수레를 끌고 노를 젓는 사람이 수백만 명인데 기계가 이렇게 갑자기 들어오면 이들이 삶의 터전을 잃는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벌어진 건, 오히려 대중교통 수요의 폭증이었다. 미국 찰스턴과 햄버그를 오가는 역마차는 매주 3회, 월 50명을 실어날랐다. 그런데 철도가 들어서자 월 이용자 수가 2500명으로 급증했다.

많은 나라에서 수도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철도는 전국을 하나로 연결하며 국가 통합에 기여했다. 39개 지방국가로 쪼개져 있던 독일은 철도경영자협회가 각 지역 관세를 통일하는 경제 통합에 먼저 나서면서 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다. 철도는 전쟁의 승패도 갈랐다. 프로이센이 자도바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누른 것도 철도 덕분이다. 철도 노선 5개를 가진 프로이센은 닷새 만에 28만5000명을 전장에 투입할 수 있었지만 노선이 하나뿐인 오스트리아는 20만명을 집결시키려면 45일이 걸렸다. 미국 남북전쟁과 러일전쟁, 한국의 6·25도 철도가 영향을 미친 대표적 전쟁으로 꼽힌다.

사소하지만 흥미로운 철도 관련 사실(史實)도 꼼꼼히 실었다. 호주에선 증기기관이나 말이 아닌 죄수가 열차를 끌었고, 1855년 개통된 파나마 철도는 1.6㎞당 120명이라는 전무후무한 산재 사망 기록을 갖고 있다.

번영을 구가하던 철도는 2차대전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잘 포장된 도로가 레일을 대체했다. 1950년 40만대였던 서독의 자동차 수가 단 20년 만에 1680만대로 급증했다. 비록 왕좌를 자동차에 내줬지만 철도는 힘없이 퇴장하지 않고 환골탈태했다. 1970년대 1차 오일쇼크로 기사회생한 뒤 여행 위주의 새롭고 다양한 서비스를 선보였고, 고속철이라는 새 시장도 개척했다. 익숙한 것들에 안주하고 싶은 유혹을 털어내게 하는 책이다.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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