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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저처럼 퇴사 두려우면 ‘낯선’ 또래들과 함께 놀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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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직장인 모임 기획자 백영선씨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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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두겠습니다.” 서른일곱의 어느 출근길.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그는 이렇게 시작하는 메일을 썼다. 그는 한 아이티업체에서 문화마케팅을 담당했다. 각종 공연과 영화제를 후원하고 회사를 알리는 일이었다. 순조롭던 회사생활은 트렌드가 바뀌면서 벽에 부딪혔다. 문화마케팅은 한 물 가버렸고 그의 업무는 자꾸 줄어들었다. ‘더 이상 나는 쓸모가 없구나.’ 그는 메일의 ‘보내기’ 버튼을 눌러버렸다. 하지만 퇴사는 불발됐다. 상사는 그에게 마케팅 대신 ‘에이치알’(HR·조직문화)을 권했다. 근무지는 제주. 가족을 두고 홀로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일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마흔이었다.

“제주도에서 매일 밤 고민했어요. ‘이대로 괜찮을까? 앞으로 뭐해 먹고 살지?’ 제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인생이 떠밀려 가고 있더라고요. 트렌드가 바뀌고, 조직이 합병되는 외부적 요인들 때문에 제 자리가 자꾸 달라지고 또 작아졌어요. 어떤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 자리를 만들어야겠다 싶었습니다.”

프로젝트 기획자 백영선(43)씨가 3년 전 ‘낯선 대학’이라는 생소한 직장인 모임을 시작한 이유다.

공대 나와 아이티업체 문화마케팅
조직 바뀌고 업무 줄어 그만두려다
준전문가 특강모임 ‘낯선대학’ 창안
4년째 4기 200여명 열광 ‘공동체’로


정규직 내려놓고 주3일 계약직 근무 시도
“주2일 외부활동으로 새로운 구상”




여느 직장인처럼 그 역시 회사 안에서 돌파구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그때 생각난 게 20대 후반 다녔던 예술경영대학원이었다. 공대 출신으로 맡게 된 문화마케팅을 이해하려고 진학한 그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다시 대학원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비싼 등록금과 회사와 대학원, 집을 오가는 복잡한 동선은 재력도 체력도 방전된 마흔의 그를 주저 앉혔다.

‘내가 대학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그는 결국 일을 벌였다. “(보통의) 특수대학원은 준전문가의 특강 위주로 수업을 진행해요. 서른에 입사했다고 쳐도 마흔쯤 되면 보통 10년 정도 경력이 쌓이잖아요? 그 정도면 준전문가고, 이들이 직접 하는 강의라면 꽤 괜찮은 특강이 되겠다 싶었어요.”

백씨의 아이디어에 방황하던 ‘마흔들’이 열광했다. 2016년 1월 백씨는 지인들로 최초 멤버 7명을 모으고, 그 7명이 각자 7명씩 초대해 총 49명의 1기 신입생을 구성했다. 최소한의 강의 전문성을 확보하고 또래 모임 효과를 높이려고 입학 나이는 만 33살에서 45살로 제한했다. 이렇게 모인 ‘유사’ 대학원에 ‘낯선대학’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낯선 사람 효과’라는 게 있어요.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주는 건 ‘친한 사람’이 아니라 ‘낯선 사람’이라는 이론이에요. 친한 사람과는 이미 모든 걸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자극을 받기 어렵죠. 반대로 건너 건너 아는 ‘낯선 사람’을 만나면 새로운 세계를 엿볼 수 있어요.”

마케터, 피디, 시인, 피아니스트 등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49명의 사람들이 매주 월요일 저녁마다 모였다. 한 주에 두 명이 각각 1시간씩 돌아가며 강의하는 게 커리큘럼. 정해진 주제나 형식은 없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하면 된다. 맥주회사 마케터는 맥주 체험장에서 맥주의 역사와 문화를 강의하고, 소리꾼은 그 옆에서 소리를 하는 식이다. 남의 얘기를 주로 ‘듣기’만 했던 이들은 1시간 동안 ‘말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고서 자신의 삶을 중간정산한다. 학기는 3월에 시작해 12월에 끝난다. 최소 1회 강의하고 7번 출석해야 졸업이다. 장소 대여료 등으로 사용되는 1년 등록금은 40만원. 지난 2016년부터 올해까지 총 4기를 거치며 200명 넘는 사람들이 함께 했다. 리뷰빙자리뷰(경험 공유 모임) , 100일 프로젝트 등 백씨가 제안한 여러 모임에 참여한 직장인까지 포함하면 1000명이 훌쩍 넘는다.

‘돌아온 대학생’들이 낯선대학에 열광하는 가장 큰 이유는 ‘환대’다. “제 또래가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정서가 ‘외로움’이에요. 인생 2막은 깜깜하고, 고민을 나눌 친구도 점점 줄고, 회사에서 자리도 자꾸 흔들리고…. 이런 상황에서 같은 생애주기를 겪는 또래공동체를 만나니 위로받는 거죠.”

감정적 지지뿐 아니라 실질적 지원도 이뤄진다. 한 멤버가 복합문화공간을 개업하면 시인인 멤버가 공간의 작명을 도와주고, 사진작가는 그곳에서 전시를 여는 식이다. “단체 채팅방에 누군가 에스오에스(SOS)를 치면 서로 도와주겠다고 난리예요. 우리는 그걸 ‘낯대(낯선대학 )찬스’라고 하죠. 이해관계나 선입견이 얽히지 않은 낯선 관계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조건 없이 호의를 베푸는 게 가능했어요.”

낮선대학의 든든한 응원을 뒷배 삼아 백씨는 최근 모험을 시작했다. 주 3일만 회사에서 일하고, 나머지 이틀은 회사 밖 다양한 모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백씨는 정규직 타이틀, 적지 않은 월급, 회사의 복지제도를 내려놨다. 대신 이틀간 외부 활동의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확보한 시간을 통해 백씨는 낯선대학 확장을 고민하고 있다. 수도권 바깥 지역에 사는 청년처럼 또래공동체가 필요한 이들이 언제든 그들만의 낯선대학을 꾸릴 수 있도록 매뉴얼을 제공하려 한다.

“인생이 정체된 것처럼 느껴지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한 번쯤 옵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퇴사하고 창업할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퇴사도 무섭지만 정체도 두려운 저처럼 겁 많은 분들, (비슷한 고민을 하는) ‘낯선 사람’을 만나보세요. 인생에 다시 활기가 돌 거예요!”

최윤아 기자 ah@hani.co.kr


백영선씨와의 인터뷰 영상. 한겨레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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