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7 (일)

이슈 불붙는 OTT 시장

"연극의 미래? 넷플릭스 대항해 삶을 바꾸는 경험 선사해야죠"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캐나다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 연극 '887' 기자간담회

"역사를 재현하고 실수 되풀이 막는 게 예술의 역할"

연합뉴스

캐나다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
[LG아트센터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수윤 기자 = "요즘 사람들은 편하게 집에 앉아 넷플릭스로 다양한 콘텐츠를 봅니다. 연극을 보려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구하고, 자동차를 끌고 극장에 가야 하잖아요. 이런 시대에 연극이 살아남으려면 삶을 송두리째 바꿀 경험을 제공해야 합니다."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62)는 27일 서울 중구 정동 주한캐나다대사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연극의 미래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오는 29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1인극 '887'을 연출하고 직접 출연한다.

그의 설명처럼 '887'은 소파에 앉아 TV로 편안하게 감상할 법한 작품이 아니다. 배우로서 살아남기 위해 대사를 암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온 역사적 맥락을 기억해야 하는 연출가의 고뇌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연합뉴스

캐나다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
[LG아트센터 제공]



연극은 르빠주가 캐나다 퀘벡에서 열리는 '시의 밤' 40주년 기념식에 초청받는 장면으로 출발한다. 그는 3쪽 분량의 시를 외워 낭송해야 하지만 막상 잘 외워지지 않는다. 그는 고대 그리스에서 내려오는 기억법을 활용하기로 하는데, 어릴 때부터 익숙한 장소에 외워야 할 사항을 배치했다가 재조합하는 방식이다. 르빠주는 자신만의 기억의 궁전을 어렸을 때 살았던 아파트 건물 '퀘벡 시티 머레이가 887번지'로 삼는다.

그는 '887'이 살아있는 기억의 예술로서 연극의 가치를 환기하는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연극이란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기억을 담아내는 예술입니다. 전체주의 체제가 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한 것은 책을 불태우는 것, 그다음은 노래하는 사람들과 이야기꾼, 배우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887'을 통해 소문자 'h'로 시작되는 제 개인적인 역사(history)와 대문자 'H'로 시작하는 캐나다의 역사(History)를 짚어보고 싶었습니다."

'887'을 만드는 과정은 감정적 롤러코스터 그 자체였다고 고백했다.

"가족 사진첩을 열어 부활절에 찍은 사진을 봤어요. 언뜻 굉장히 행복해 보였는데, 디지털 형식으로 사진을 확대해보니 제 눈동자에 서린 표정이 그 이면에 있던 슬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더군요. 어찌 보면 스스로 나쁜 기억은 모두 밀어버리고 좋은 것만 기억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연합뉴스

캐나다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
[LG아트센터 제공]



르빠주는 특히 '887'을 이해하기 위해선 배경이 되는 1960년대 퀘벡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퀘벡은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훗날 영국 지배를 받은 지역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캐나다 퀘벡은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변혁을 겪었습니다. 계급적 갈등과 마찰이 끊이지 않았죠. 나라 전체가 이중 인격적 면모를 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모두 기억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50년, 100년 전만 돌아봐도 여러 재앙이 있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같은 실수를 하고 같은 행보를 걸어요. 예술가로서 저는 우리가 과거 어떤 짓을 했는지 끊임없이 되살리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하는 게 예술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르빠주는 전통적인 연극의 형식에 혁신적인 기술을 도입한 연출가로 유명하다. 1994년 연극, 영상, 디자인, 음악, 오페라, 인형극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작업할 창작집단 '엑스 마키나'를 설립했다. 엑스 마키나는 '기계 장치'란 뜻이다.

"사실 저는 신기술에 깜짝 놀랄 정도로 무지한 사람입니다. 노트북으로 이메일을 보내는 것조차 어려워하죠. 하지만 운 좋게도 주변에 기술에 익숙한 젊은이가 많고, 덕분에 늘 열린 마음으로 작품에 신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연극은 일종의 '모태 예술'(Mother art)입니다. 연기뿐 아니라 무용, 음악, 문학 등 다양한 장르를 품고 있죠. 그런 특성상 늘 새로운 가능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연극 '안데르센 프로젝트' 이후 12년 만의 내한이라는 르빠주. 그는 한국 관객들을 만날 생각에 무척 설렌다며 들뜬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한국 관객의 평균연령이 굉장히 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극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놀랍다"고 말했다.

이날 간담회에 함께한 마이클 대나허 주한 캐나다 대사는 "르빠주 씨는 예술과 기술을 넘나드는 창조적 연출가이자 배우이자 작가"라며 "캐나다의 뛰어난 작품이 한국에 많이 소개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6월 2일까지 공연. 4만∼8만원.

연합뉴스

캐나다 연출가 로베르 르빠주
[LG아트센터 제공]



clap@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