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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이슈 '브렉시트' 영국의 EU 탈퇴

[박종원의 News 속 인물] '브렉시트'의 대명사, 보리스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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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보리스 존슨 영국 전 외무장관.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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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운동이 한참 움트던 지난 2015년, 당시 런던 시장이었던 보리스 존슨은 미국 ABC방송과 인터뷰에서 대권에 관심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내 생각에는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총리가 사임할 때면 난 꾀나 늙은이가 될 거다"고 말했다. 헝클어진 머리와 직설적인 언변으로 유명했던 그는 브렉시트 찬성 운동을 진행하며 '솔직한 영국인' 이미지로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존슨은 "(캐머런이 사임할 때쯤이면) 젊은 활력이 필요할 거고 어쩌면 오늘 나랑 같이 사진을 찍은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총리 후보에 오를 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캐머런은 이듬해 브렉시트 국민투표 직후 사임했고 존슨은 총리 후보로 나섰으나 사퇴하고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 아래서 외무장관을 지냈다. 2015년 인터뷰 이후 약 4년이 지난 지금, 메이 총리의 사임 선언으로 총리직은 다음달에 다시 공석이 될 예정이다. 여전히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는 존슨은 현재 집권 보수당 내에서 총리 후보 1순위로 떠올랐다. 두 번째로 대권에 가까워진 그가 이번에는 총리가 될 수 있을까?

보리스 존슨의 풀네임은 알렉산더 보리스 드 페펠 존슨이다. 그의 아버지 스탠리 존슨은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정치인이었는데 친가와 외가에 각각 터키와 프랑스 혈통이 섞여있었다. 보리스 존슨의 어머니인 샬롯 포셋은 화가이자 러시아계 유대인의 손녀였다. 보리스 존슨의 풀네임이 이토록 길고 복잡한 것은 이러한 가족 내력 때문이다. 존슨은 이런 이유 때문에 스스로를 인종 "도가니"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에서 유학하던 아버지 때문에 1964년 6월 19일 미 뉴욕의 부촌에서 3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국 나이로는 올해 56세다.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존슨은 1969년에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와 초등학교를 다녔고 10세 되던 해 아버지가 EU 집행위에서 일하면서 벨기에 브뤼셀로 옮겨갔다. 덕분에 유창한 프랑스어를 배우게 됐다. 그는 이후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명문 기숙학교인 이튼 칼리지에 들어갔으며 1983년에 옥스퍼드의 발리올 칼리지에 들어가 고전문학을 전공했다. 1987년 졸업과 함께 첫 부인 모스틴 오웬과 결혼했던 존슨은 영국 컨설팅업체인 LEK 컨설팅에 입사했으나 1주일 만에 때려치우고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같은해 영국 타임지의 기자로 입사했지만 기사에서 인용문을 조작해 해고됐고 곧 다른 일간지인 텔레그래프에 들어간다. 존슨은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브뤼셀 특파원으로 활동했고 그때부터 EU 체재를 비판하는 기사로 유명해졌다. 그는 영국으로 돌아온 뒤 텔레그래프와 자매 시사잡지인 스펙터에 정치 칼럼을 쓰기 시작했고 1999년에는 스펙터의 편집장으로 일하게 된다.

존슨은 정치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입문할 생각을 품게 됐다. 그는 1997년 보수당 후보로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노동당 후보에 참패했고 이후 인지도를 쌓기 위해 방송에 출연하기로 했다. 존슨은 1998년부터 영국 BBC의 시사 토크쇼에 출연해 갈팡질팡하는 행동과 돌발 멘트로 주목을 끌었고 점차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는 2001년 하원의원 선거에 보수당 후보로 다시 출마해 옥스퍼드주 헨리온템스에서 승리를 거뒀다. 존슨은 비록 2005년에 돈 문제로 스펙터에서 해고됐지만 하원의원 재선에는 성공했으며 2007년에는 런던 시장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당시만 하더라도 어설픈 언행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존슨은 그러나 런던 시내 범죄와 교통 개선을 내건 공약으로 인기를 얻어 간발의 차로 시장에 당선됐다. 그는 겸직하던 하원 의원 임기가 2008년에 끝나자 시장 역할에 몰두했고 2012년 시장선거에서 연임에 성공했다. 존슨은 이에 그치지 않고 2015년 총선에 다시 출마해 하원의원에 당선됐으며 2016년까지 의원과 시장직을 겸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2016년부터 급물살을 탄 브렉시트 운동이었다. 존슨은 당시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운동을 이끌며 과감하고 직설적인 언사를 쏟아냈고 브렉시트 지지자들의 우상이 됐다. 그는 브렉시트 시대를 이끌 유력한 총리 후보로 떠올랐으나 브렉시트 운동을 함께 했던 마이클 고브 환경장관이 존슨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스스로 총리 후보로 나서면서 사면초가에 빠졌다. 존슨은 결국 총리 경선에서 하차했으나 이후 탄생한 메이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맡았다.

애초부터 EU와 연을 끊자고 주장했던 그는 장관직을 수행하면서도 메이 총리와 자주 충돌했다. 메이 총리는 애초에 브렉시트를 반대하던 인물로 EU와 브렉시트 협상을 추진하면서 EU 단일 관세시장에 남기 위해 적지 않은 타협을 했다. 이를 참지 못했던 존슨은 장관이 된 지 약 2년만인 지난해 7월에 사임하고 하원 내에서 반(反) 메이 세력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메이 총리는 보수당 내 강경 브렉시트 세력의 저항을 이기지 못했고 6월 7일부로 사임할 예정이다.

존슨은 5월 현지에서 진행된 차기 총리후보 지지율 여론조사에서 39%의 지지를 받아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이에 대해 현지 언론들은 길고 긴 브렉시트 협상에 지친 유권자들이 일단 어떻게든 브렉시트를 빨리 끝내줄 인물을 찾고 있다고 분석했다. 존슨은 5월 인터뷰에서 EU와 협상을 하든 못하든 오는 10월말까지 브렉시트를 끝내겠다고 공언했다.

다만 당내에서는 아직 존슨의 승리를 확신하기 어렵다는 분위기다. 우선 존슨이라는 인물 자체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나 일본 우익 인사들이 얌전해 보일 정도로 '망언제조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는 외무장관 사임 직후 텔레그래프에 기고한 글에서 이슬람 전통 의상인 부르카를 착용한 여성을 "우체통"이나 "은행강도"처럼 보인다고 적었다. 장관 재직 시절이었던 2017년 9월에는 영국 식민지였던 미얀마 방문길에서 식민지 시절을 연상시키는 시를 ?고 다녀 주 미얀마 영국 대사가 장관을 말렸을 정도다. 존슨은 그 외에도 언론인 시절부터 여성이 "신랑감을 찾기 위해 대학에 간다"는 등 여성과 이슬람 신자, 성소수자 등을 차별하는 어록을 남겼다. 아울러 그의 외무장관 시절을 기억하는 측근들은 그가 역대 최악의 장관이었다며 존슨이 충동적이고 원칙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반감 때문에 보수당 내에서는 적어도 '보리스만은 안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고브 장관이 이번 총리 선거에 다시 출사표를 낸 만큼 존슨에게 승산이 없다는 의견도 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영국 법원은 지난달 29일에 존슨이 지난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를 앞두고 허위사실을 유포해 공직자 윤리를 어겼다며 법정 출두를 명했다. 당시 존슨은 영국이 EU에 매주 3억5000만파운드(약 5286억원)을 퍼준다고 주장했는데 해당 발언이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브렉시트의 주역이자 2번째로 총리 후보에 오른 존슨, 그가 이번에 총리에 올라 3년 전에 불붙인 브렉시트의 화염을 제대로 마무리 할 수 있을지는 이제 영국인들의 선택에 달렸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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