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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크루즈선, 추돌 후 슬금슬금 후진… 수십초 머문 뒤 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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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유람선 참사] '다뉴브강 뺑소니'의 재구성

크루즈선, 사고 알고 돌아와 살핀 정황… 적극적 구조 없이 가버려

1일(현지 시각) 헝가리 유람선 선사(船社) 모임인 '크루즈 얼라이언스'가 7분22초짜리 사고 당시 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은 한국인 관광객이 타고 있던 유람선을 침몰시킨 바이킹 시긴호의 책임을 좀 더 분명히 드러냈다. 영상에 담긴 정황은 선장의 '뺑소니' 의혹까지 불러일으켰다.

해당 영상 속 두 선박은 강의 북쪽을 향해 운항하고 있다. 바이킹 시긴호가 허블레아니호를 진행 방향 왼쪽 뒤편에서 따라가는 모습이다. 두 선박이 머르기트 다리를 지나기 직전, 바이킹 시긴호가 오른쪽 앞 뱃머리로 유람선 허블레아니호의 선체 왼쪽 뒷부분을 추돌한다(영상 2분 15초 지점). 추돌당한 허블레아니호는 선미(船尾)가 시계 반대 방향으로 급하게 돌아가 버린다. 하지만 무게가 25배(1000t)에 달하는 바이킹 시긴호가 그대로 허블레아니호를 내리누르며 지나가면서, 허블레아니호는 10초 뒤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2분 25초). 헝가리 매체 인덱스는 "이 영상의 화면을 최대한 확대해 분석한 결과, 희미하지만 사고 직후 물에 빠진 5~6명의 움직임을 볼 수 있다"며 "바이킹 시긴호 승무원들이 급하게 뛰어다니면서 두 개의 구명조끼를 던지는 모습도 나온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

①지난 29일 밤(현지 시각)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강 머르기트 다리 부근. 한국인 관광객이 탄 허블레아니호(앞쪽 작은 선박)가 상류 방향으로 시속 7.6~7.8㎞로 이동하는 가운데 바이킹 시긴호(뒤쪽 큰 선박)가 시속 12.2~12.4㎞로 접근. ②바이킹 시긴호, 오른쪽 뱃머리로 허블레아니호 왼쪽 선미(船尾) 추돌. 허블레아니호 선체 시계 반대 방향으로 급하게 회전. ③25배 무거운 바이킹 시긴호가 허블레아니호 선체를 수면 아래로 내리누르며 전진. 허블레아니호 7초 만에 침몰, 바이킹 시긴호는 사고 지점 이탈. ④바이킹 시긴호 10여초 후 후진해 사고 지점에 돌아왔지만 적극적 구조 활동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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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를 늦춘 바이킹 시긴호는 1분여 뒤 화면 밖으로 완전히 사라진다(3분 27초). 하지만 곧 후진해 와 사고 지점에 멈춰 섰다. 사고 사실을 알고 돌아와 현장 상황을 살핀 것이다. 하지만 바이킹 시긴호는 화면에 재등장한 지 41초 만에 다시 전진하면서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5분 5초). 바이킹 시긴호가 정박한 것은 40여분 뒤 사고 현장에서 북쪽 상류 방향으로 1㎞ 떨어진 지점이었다.

해당 영상을 본 한국의 안전·선박 전문가들은 바이킹 시긴호의 '뺑소니 가능성'을 제기했다. 바이킹 시긴호의 선장이 사고를 인지하고 후진해 상황을 살폈지만, 현장에서 적극적인 구조 활동을 하지 않고 도주했다는 것이다. 임남균 목포해양대 교수는 "당시 상류 방향으로 운항하던 바이킹 시긴호가 엔진을 꺼 물살에 뒤로 떠밀려왔거나 역추진으로 후진했을 것"이라며 "사고 현장에 돌아왔다가 신고나 구조 활동 없이 다시 떠난 것은 문제가 된다"고 했다.

지난 31일 현지 언론이 공개한 헝가리 수상 구조대와 민간 선박들의 무전 내용에는 사고 당시 현장에 있던 민간 선박들이 구조 활동을 벌이는 내용이 나온다. 다른 관광 유람선에 있었던 선원 노르베르트 머르데르는 APTN 인터뷰에서 "무전기에서 '사람이 배에서 떨어졌다'는 내용을 듣고 구명기구를 던져 한국 여성 2명을 구조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주된 사고 원인으로 바이킹 시긴호 선장의 '운항 중 부주의'를 꼽았다. 운항 경력 25년인 임긍수 목포해양대 교수는 "바이킹 시긴호가 안전 거리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의 속도로 운항한 것 같다"고 했다. 항로 추적 사이트 마린트래픽에 따르면, 사고 직전 시속 7.6~7.8㎞로 운항하던 허블레아니호를 바이킹 시긴호가 시속 12.2~12.4㎞로 뒤따랐다. 해경 출신인 함혜현 부경대 교수는 "늘 다니는 길이라는 생각에 근처 선박의 속도와 방향을 알려주는 자동식별장치(AIS)를 무시하고 운항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바이킹 시긴호 선장이 허블레아니호를 못 봤을 수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선장이 배 뒤쪽 조종실에서 수십m 길이의 선체를 내려다보며 운항할 때는, 선장의 전방 시야에 '맹목(盲目) 구간'이라는 일종의 사각지대가 발생한다. 멀리 있는 강물은 보여도, 뱃머리 바로 밑 상황은 안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임남균 목포해양대 교수는 "사고 당시 야간 운항 상황에 비까지 와 시야가 좋지 않았고, 두 선박이 무척 가깝게 붙었기 때문에 바이킹 시긴호 선장이 허블레아니호를 보지 못했을 수 있다"고 했다.

바이킹 시긴호를 보유한 스위스 선박 업체 바이킹 크루즈사는 평소에도 부주의로 인한 사고가 잦았다고 한다. 올해만 벌써 세 번째 사고다. 헝가리 법원은 부주의와 업무상 태만으로 사고를 낸 혐의로 지난 31일 바이킹 시긴호의 선장(64)을 구속했다. 선장의 변호인은 "규정을 위반하지 않았고 범죄라고 볼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며 "많은 희생자를 초래한 데 대해 선장이 충격받았으며 피해자 가족에게 애도의 뜻이 전달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헝가리 언론에 밝혔다.

[부다페스트=손진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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