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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1 (토)

성대결 부추기는 경찰 체력검정… 현장중심형으로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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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동떨어진 잣대… 비판여론 거세 / 팔굽혀펴기 등 단순 동작만으로 평가 / 치안현장서 업무수행 가능 여부 의문 /기준 강화된 개선안도 갈등 소지 여전

세계일보

‘대림동 여경’ 영상이 지난달 16일 인터넷을 통해 확산하면서 여경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여론이 들끓었다. 해당 여경이 주취자를 제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체포 시 다른 남성 경찰관에게 “나오세요. 수갑 채우세요” 등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을 나오면서 이른바 ‘여경무용론’까지 등장했다. 함께 불똥을 맞은 것이 경찰의 체력검정이었다. 네티즌은 한국 경찰 채용 체력검정에서 남녀의 기준 차이가 매우 크고, 특히 여성은 무릎을 대고 팔굽혀펴기를 한다는 점을 꼬집었다. 경찰청이 경찰의 자질 유무를 가르지 못하는 유명무실한 잣대로 여경을 뽑고 있다는 질타도 뒤따랐다.

상당수 국민들이 “남녀 체력검정을 같은 기준으로 하라”는 주장을 펴면서 대림동 여경 논란은 삽시간에 남녀 성대결로 치달았다. 이 갈등의 근본적 이유는 경찰 체력검정 제도 자체가 실제 경찰 업무와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윗몸일으키기, 달리기, 팔굽혀펴기 등 단순 동작만을 가지고 평가하다 보니 남녀의 신체적 차이를 무시할 수도 없고 치안현장에서 남녀 경찰이 동일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늠도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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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찰 체력검정, 동아시아 국가들과 비슷

현행 경찰 채용 체력검정에서 남녀의 기준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7일 경찰공무원 채용시험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경찰공무원에 지원하는 성별에 따라 체력검정 기준이 상이하다. 이를테면, 여성 지원자가 1000m 달리기에서 10점 만점을 받을 수 있는 기록은 290초 내에 들어오는 것이지만 남성은 280초 이상을 기록해봤자 1점밖에 못 받는다. 팔굽혀펴기는 여성은 1분에 50회 하면 만점이고 남성은 46~51회 하면 8점이라 비슷한 듯 보이나 여성은 무릎을 대고 팔굽혀펴기를 해 유사한 기준이라고 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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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국가들 역시 한국처럼 신임 경찰을 채용할 때 남녀에 따라 다른 기준을 두고 있다. 일본은 자치경찰제를 시행하고 있어 현마다 체력검정이 다르지만 대부분 한국과 유사한 수준이다. 시즈오카현에서는 팔굽혀펴기 종목에서 남성은 42회 이상이 만점이고 여성은 36회 이상이 만점으로 8회 차이난다. 후쿠오카현의 경우는 남성이 30회 이상, 여성이 15회 이상이어야 만점이다. 물론 여성이 무릎을 대고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다는 규정을 가진 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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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경찰은 좌우 악력 종목에서 남성은 76.3kg, 여성은 49.1kg의 힘이 측정돼야 하는데 한국은 각각 61kg 이상, 40kg 이상으로 남녀 차이는 유사한 수준이나 대체로 기준 자체가 다소 하회한다. 대만 경찰도 달리기 종목에서 남성은 1600m를 494초 안에, 여성은 800m를 280초 안에 완주해야 해 한국의 팔굽혀펴기처럼 기준의 종류 자체가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단순 종목으로 경찰 채용시험을 보는 국가들은 남녀 기준에 차이를 두고 있다. 남녀의 신체적 차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남녀 기준을 동일하게 만들어놓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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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경찰 채용 체력검정에서 한국 여성 지원자(왼쪽 사진)가 무릎을 대고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는 반면 외국의 여성 지원자는 정자세로 동작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서구는 현장 중심형 체력검정

미국 주(州) 70% 이상, 영국, 캐나다 등 서양 국가는 대체로 신임 경찰 체력검정에서 남녀 차이가 없다. 단순한 힘겨루기나 지구력 등을 시험 보는 게 아니라 치안현장에서 실제 일어날 수 있는 범죄 유형에 따라 경찰로서 걸맞게 대처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당연히 남녀 성대결이나 역차별 문제가 거론될 소지도 없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뉴욕 경찰(NYPD)의 체력검정이다. NYPD는 장애물오르기, 계단오르기, 모의 신체 제한, 추격전, 희생자 구출, 방아쇠 당기기 등 6개 종목 연속하는 것으로 체력을 검정한다. 장애물오르기는 후보자들이 무릎을 꿇고 무기를 준비해서 전속력으로 15m를 달려 180cm의 장애물을 오르는 것이다. 희생자 구출은 후보자들이 추격전을 마치고 2m 높이에 있는 79kg짜리 마네킹을 구출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경찰(SFPD)도 63kg 인형을 7.5m 끌기, 권총으로 25초 안에 과녁에 12발 맞히기 등으로 현장 친화적이다. 단순 종목이 아닌 복합적인 상황 안에서 남자, 여자가 아닌 1명의 경찰로서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가를 보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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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찰이 2003년 개발한 신체능력테스트(JAPPT)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은 신임 경찰 채용 체력검정은 한국과 유사하지만 기존 경찰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JAPPT는 NYPD 체력검정처럼 현장형이다. JAPPT는 ‘도주하는 피의자를 추적하고 제압한다’는 목적 아래 연령과 성별 차이를 두지 않는다. JAPPT는 총 3단계로 나뉘는데 우선 정해진 코스에서 장애물 왕복달리기를 2회 실시하고 다음 단계로 고깔 4개를 8자 모양으로 2바퀴 돌며 마지막 단계로 장애물을 뛰어넘으면서 팔굽혀펴기와 윗몸일으키기를 3세트 반복하는 것이다. 총 주행거리는 160m다. 일본 경찰은 피의자를 추적해 체포할 수 있는 경찰관의 주행거리가 보통 150m 이내라는 연구에 근거해 JAPPT를 만들었다.

◆개선안도 도긴개긴…“근본 개혁해야”

한국 경찰은 지속적인 비판 여론에 따라 개선된 체력검정을 경찰대 채용에는 2021학년에, 전체 순경 채용은 2022년부터 적용할 방침이다. 하지만 개선안도 기계적으로 체력검정 기준을 강화해 놓은 수준이고 남녀 차이는 여전히 존재하는 단순 종목들이라 남녀 갈등의 빌미를 줄 가능성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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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에서 용역을 줘 연구한 ‘경찰대학·간부후보 남녀 통합선발을 위한 체력기준 마련 보고서’에 따르면 종전에 여성이 무릎을 대고 팔굽혀펴기를 한다는 규정을 없애는 대신 최저기준을 11개 이하에서 6개 이하로 낮췄다. 악력은 남성이 38kg 이하에서 39kg 이하로, 여성은 22kg 이하에서 24kg 이하로 강화됐고 윗몸일으키기는 남성과 여성이 각각 1분당 22개 이하, 13개 이하에서 31개 이하와 22개 이하로 숫자만 강화한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신임 경찰 체력검정이 현장에 더 알맞고 남녀갈등 소지를 없애는 쪽으로 가려면 NYPD 등처럼 현장중심형 체력검정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건수 백석대 교수(경찰학)는 “남녀가 아닌 경찰의 자질을 검증하는 체력검정이라면 기준을 달리 둘 필요가 없다”며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면 채용 자체를 내근직, 외근직을 나누고 외근직의 경우 선진국처럼 현창 친화적이고 세밀한 체력검정을 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이웅혁 건국대 교수(경찰학)도 “서양 경찰은 경찰의 물리력 사용이 법적, 사회적으로 용인돼 있다”면서 “한국도 무조건 경찰 장비를 쓰지 말라는 등 소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통념을 바꾸면 경찰 체력검정을 실제 맞닥뜨리는 현장상황 중심으로 개선하기 용이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대림동 여경 사건 핵심 쟁점은 공권력 경시풍조”

이른바 ‘대림동 여경’ 영상이 주로 남녀 경찰의 현장 대응능력과 체력 문제로 비화했지만 남성과 여성 경찰을 단순히 신체적 능력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여성 피해자와의 소통 등 치안현장에서 여경의 필요성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경찰의 능력을 단순히 힘의 세기로 치환하기는 무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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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한 남성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여경의 대응이 미숙했다는 논란이 제기된 동영상 장면. 구로경찰서 제공


7일 경찰청에 따르면 2017년 말 기준 여경 1인당 담당하는 여성 피해자 수는 33명이다. 이는 남경 1인당 담당하는 남성 피해자 수 7명에 비하면 4배가 넘는 수치다. 1인당 피의자 수 역시 여경이 맡은 여성 피의자는 25명으로 남성이 맡은 남성 피의자 13명에 비하면 2배에 가깝다. 성폭력 사건이나 여성 문제가 관련된 수사는 여경의 소통능력이 필수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범죄자 제압 능력만 가지고 ‘여경 무용론’을 논하는 것은 비약일 수 있다는 얘기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지난 4월 말 기준 한국 여경은 1만4302명으로 전체의 11.6%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독일(23.7%), 프랑스(17%), 미국 뉴욕(17%) 등 선진국에 비하면 적은 수치다.

경찰 젠더연구회는 이에 지난달 21일 입장문을 내 대림동 여경 사건의 핵심은 여경 대처 미흡이 아닌 공권력 경시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주취자가 경찰관에게 욕설을 하고 뺨을 때리고 몸을 밀쳐 공무집행을 방해했다”며 “한국의 공권력 경시풍조에 대한 경종이 돼야 하지 여경에 대한 혐오로 확산해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서울 일선 경찰서의 한 경찰관도 “피의자건 피해자건 출동한 경찰관에게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고 폭언, 욕설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라며 “국민들이 영상에 나온 남녀 경찰관이 당한 수모에 조금 더 공감하고 분노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경찰 체력검정 개선 문제는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민갑룡 경찰청장이 2022년 채용부터 체력검정기준을 개선한다고 발표하자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지난달 27일 “여경 체력검정절차 보완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에 양성평등여성연대 ‘도시락’ 준비위원회는 지난 2일 “무릎을 대고 팔굽혀펴기를 하는 등 현재 여성 경찰 체력검정 기준은 누가 봐도 납득하기 힘든 성차별적 기준”이라며 “채용 기준에 남녀격차를 두는 것이야말로 여성 혐오”라고 반발했다. 단순 종목 체력검정은 이처럼 기록 차이를 없애거나 늘려도 계속 공방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는 전문가들이 경찰 체력검정을 현장중심형으로 개선해 나가자고 주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청윤 기자 pro-verb@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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