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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형의 죽음으로도 바뀌지 않아” 고 이한빛 PD 동생이 책을 쓴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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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솔 한빛센터 이사 <가장 보통의 드라마> 펴내

스태프 인터뷰 등 통해 촬영현장의 살인적 노동 고발

직접 AD·단역배우로 근무 “턴키계약 등 문제” 지적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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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에 끝내놓고 2시간 동안 자라고 찜질방을 보냈어요. 그런데 다들 찜질방을 가지 않고 현장 버스에 그대로 남아있어요. 쉬러 가면 다시 깨기 어려울 테니까요.”

“코피가 나는 코를 부여잡고 다시 촬영장으로 향하는데, 눈에는 눈물만 흐르네요.”

“사극을 하고 있었는데, 대본에 ‘치열한 전투’라고만 쓰여 있었어요. ‘치열한 전투’라는 다섯 글자가 나오는 순간 ‘아, 오늘 날 다 샜구나’ 했죠.”

“새벽 4시까지 찍고 7시까지 ○○으로 넘어가야 했어요. 우리 팀은 운전기사가 없는 팀이거든요. 아무리 새벽이라도 ○○까지 족히 두 시간은 걸리는데. 결국 졸음운전으로 사고가 크게 났어요.”

-에세이 <가장 보통의 드라마> 중



분야와 사정은 조금씩 다르지만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일하는 방송노동자의 고충은 한결같다. 한번 잠 들면 다시 깨기 어려울 정도의 수면 부족에 시달리며 장시간 노동을 하고, 코피를 흘리거나 졸음운전을 하면서도 촬영 현장으로 향한다. 그렇게 도착한 현장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듯 밤을 새워 피디와 배우를 보조한다.

2016년 10월 드라마 <혼술남녀>의 조연출 이한빛PD가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내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다”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지 2년 반이 지났지만, 방송노동자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피디의 동생인 이한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가 드라마 제작 현장의 살인적 노동을 고발한 에세이 <가장 보통의 드라마>를 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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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사는 이 피디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변하지 않는 드라마 제작 현장을 알리기 위해 직접 에세이를 썼다. 촬영·조명·미술팀 등 실제 현장에서 일하는 스태프의 제보와 인터뷰, 그리고 이 피디 사망 뒤 ‘TVN 혼술남녀 신입 조연출 사망 대책위원회’와 한빛센터 활동을 이어오며 남긴 2년여의 기록이 에세이의 바탕이 됐다.

이 이사는 10일 <한겨레>와 만나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터지는 안전, 임금 문제를 알리기 위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이 이사는 “현장에서는 종합적으로 문제가 터진다. 드라마 <화유기> 촬영 때는 안전 이슈가 불거졌고 여러 드라마에서 장시간 촬영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임금을 못 받았다거나 성폭력에 노출됐다는 제보도 있었다”며 “현장에 어떤 문제들이 산재되어 있는가를 시민들에게 안내할 자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2017년 12월 드라마 <화유기> 촬영 당시 한 스태프가 세트장에 샹들리에를 매달다 추락해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다. 지난 1일부터 방영 중인 드라마 <아스달연대기>는 스태프들이 주 100시간 이상 노동에 내몰린 것이 알려져 방영 전부터 논란이 됐다.

이 이사는 책을 준비하며 에이디(AD·감독을 보조하는 스태프)나 단역 배우로 일하기도 했다. 그가 현장에서 체감한 문제는 결국 근로계약상의 문제와 그에 따른 문화·관행상 문제로 수렴했다. 그는 “턴키계약으로 대표되는 근로계약상 문제가 있다. 개별팀이 개인사업자로 방송국 등과 계약을 맺는 것다. 스태프들은 실제로는 방송국의 지시를 받으며 일하지만 노동자성을 인정을 못 받고 4대 보험 적용과 같은 기본적인 보호도 받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노동자로 인정 안 되니 근로기준법을 안 지켜도 되는 게 문화로 자리 잡았다. 방송을 어떻게든 내보내야 한다는 명분이 상황을 압도하게 되고 근로기준법상 대우를 해주지 않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방송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노동자성을 인정받기 위한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10일 희망연대노조와 이 PD의 아버지인 이용관 한빛센터 이사장 등은 추혜선 정의당 의원과 함께 제작사와 방송사로부터 턴키계약을 강요받아온 146인의 방송노동자들이 실명으로 참여한 ‘노동자성 인정 촉구’ 연서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이사장은 이 자리에서 “(노동에 관한) 모든 권한을 방송국이 가지고 있어도 스태프들은 노동자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들이 제대로 근로계약서를 쓰고 촬영에 임해야 노동자로서의 당당함이 작품에 드러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이사는 <가장 보통의 드라마>의 출간과 한빛센터 활동 등을 통해 드라마 제작 환경이 한 걸음씩 나아지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는 “처음에는 ‘과연 스태프들이 노동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었는데 지금은 노동자인 것은 기본이고 직접 고용을 촉구하는 단계까지 왔다. 긍정적인 변화도 있으니 근로계약상의 궁극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가장 보통의 드라마>는 이달 중순 출간을 앞두고 있으며 책 수익의 일부는 방송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캠페인에 쓰일 예정이다.

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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