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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 (금)

“아버지가 나를 기다릴 거 같아서”…북파 된 소년은 남쪽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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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1955년 국군 북파 공작원들에게 납치돼 남한에 끌려온 김성길씨가 지난 21일 강원도 춘천 집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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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1955년 함경도 마을에서 납치…아들 볼모 잡힌 아버지, 북파 공작 수행
첩보부대, 아버지 사망 숨기고 15살 아들에게 공작원 교육 ‘두차례 북으로’
특수임무 보상 신청 기록이 보여주는 사실관계…“망자 볼모 이용 패륜 행위”



20세기 중반,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은 수백만명의 목숨을 빼앗고 곳곳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남북한 양쪽은 1953년 정전협정을 맺고도 수십년 동안 공작원들을 밀파하며 치열한 첩보 공작과 심리전을 이어갔다. 남쪽도 북파 공작원을 보낸 사실은 오랫동안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북파 공작원을 공식 인정한 것은 2003년 국회에서였다. 당시 정부는 한국전쟁 이후 1만3천여명의 ‘특수임무’ 수행자들을 양성했으며 그중 7726명이 임무 수행이나 훈련 중 사망했다고 밝혔다. 그해 12월에는 실화를 재구성한 영화 ‘실미도’가 개봉돼,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관객 1천만명을 돌파(1108만명)했다. 2004년 7월에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에 관한 법률’이 발효됐다. 그러나 뒤늦은 보상에서조차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도 많다. 특히 북한에서 국군 공작원들에게 붙잡혀온 민간인이 다시 북파 공작원으로 동원된 사례는 ‘있지도 않고 확인할 수도 없는 일’로 부정됐다. 함경남도 북청군 바닷가 마을이 고향인 김성길(82)씨도 그중 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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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북한 함경남도에서 남한의 북파 공작원들에게 아버지와 함께 납치됐던 김성길(82)씨가 지난 21일 강원도 춘천 집에서 아버지의 전사확인서를 들어 보이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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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8월, 당시 13살이던 김씨는 대한민국 육군 첩보부대(HID) 소속 공작원들에게 아버지와 함께 납치돼 한국 땅 강원도로 끌려왔다. 아버지 나이는 당시 한국인 기대수명(1960년 52.4세)에 이른 53살 고령이었다. 한국군은 이들 부자를 서로 인질로 삼아 북파 교육훈련을 시켰다. 이듬해인 1956년 10월, 김씨의 아버지는 북파 공작에 동원됐다가 사망했다. 그러나 국군 첩보부대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죽음을 감췄다. 1957년부턴 15살 아이에게도 군사 훈련을 시키고 두 차례나 북파 공작에 동원했다. 김씨가 아버지의 죽음을 공식 확인한 것은 반세기가 지난 2009년이 되어서였다.





‘전쟁고아’로 중학교 보내준 뒤…





김씨는 지난해 4월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여태 1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한겨레’는 지난 21일 강원도 춘천에서 김씨를 만나 기구한 사연을 들었다. 그가 가족과 변호사가 아닌 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제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 망천이라는 곳이에요. 집이 해안가 부락인데, 1955년 8월 밤(새벽 1시께)이었어요. 그때 저는 중학교 1학년 1학기 마치고 여름방학 때. 하도 더우니까 집 앞마당에 멍석 깔고 아버지하고 둘이 잤어요. 방에는 엄마하고 누나하고.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잠을 깨워요. 눈을 떠보니까 캄캄한 밤에 안개도 자욱한데, 손에 시커먼 걸 들었는데 총이에요. 입을 막으면서 ‘소리 지르면 죽여!’ 속삭이는데, 기절초풍할 거 아닙니까?”



김씨는 그길로 바닷가로 끌려나갔다. “사람들이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나와요. 7~8명 되는 것 같았어요. 70m쯤 해안가로 나가니까 작은 목선이 두개 있더라고요. 나 먼저 태우더니 (먼바다 쪽으로) 나가더군요. 뒤를 돌아보니까 아버지가 또 나와요. 한참 나가다 보니까 인민군 해안 초소에서 알고 사격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거리가 있으니까 맞을 리가 없죠. 한참 나가다 보니까 시커먼 게 바다에 떠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공작선 모선이야. 그게 남조선에서 왔는지 그땐 아무것도 모르지.”



김씨 부자는 한참 동안 배를 탔다가 그날 오후 4시께 생전 낯선 땅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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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휴전 이후 1950년대 말까지 활동한 육군첩보부대 제1교육대생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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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제진항. 지금 통일전망대 바로 밑이에요. 거기가 육군 첩보부대(HID) 동해안 공작대 62지대예요. 본부 아래 62지대, 65지대, 선박대, 교육대가 있었어요. 해변가에 내려서 늦은 점심을 주는데 목에 넘어갑니까? 그러고는 본부로 데려가 옷을 다 벗기고는 헐렁한 군복으로 갈아입혔어요.”



김씨 부자는 본부에서 20일간 각종 정보 수집을 위한 집중 신문을 받았다.



“아버지 따로, 나 따로 조사받았어요. 나한테는 북에서 학생들 노력 동원 같은 거 묻고, 김일성 장군 노래와 (북한의) 애국가도 부르게 하고. 그때 녹음기라는 걸 처음 봤어요. 거기 한동안 있다가 밤에 또 앰뷸런스에 태우고 산중으로 계속 들어가는 거예요. ‘아, 이제 다 죽이려고 하는가…’ 참 그때 심정이란, 말 못 합니다. 아버지를 꼭 붙잡고 있는데 도착해보니 교육대예요. 교육대 아지트에 수용됐어요.” 김씨는 납치된 날짜와 당시 상황, 그 뒤 수십년간 겪은 온갖 고초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좋은 거는 잊어버렸는데 나쁜 거는 꼭 기억에 남더라”고 했다. “1955년 10월경이 됐나? 부대에서 사람이 올라오더니 아버지하고 얘기하는데 ‘얘가 이북에서 중학교에 다녔다고 하니, 우리가 (남한에서) 중학교에 보내줄 테니 우리 업무에 협조해주시오’ 하더라고요.”



부대는 김씨를 강원도 고성의 한 중학교에 ‘고아’ 신분으로 입학시켰다. 북에서 납치됐다는 말은 입도 뻥긋 말라는 으름장을 들었다. “새벽 5시에 밥 먹고 기다리다가 급수차 나가면 타고 학교 갔다가 오후 늦게 부대로 돌아와요. 거리가 멀고 산중이니까. 헐렁한 군복 입고 다녔어요. 점심은 먹어보지도 못했어요. 도시락 싸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먹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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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가 인터뷰를 위해 사전에 정리한 메모. 이정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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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가에서 서너달, 아버지와 마지막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사라졌다. 끌려온 지 두달 만에 아버지는 아들을 볼모로 잡힌 채 북파 해상침투와 공작훈련을 받았다. 아들은 그런 사실을 까마득히 몰랐다.



“제가 아버지를 찾으니까 ‘네 아버지는 다른 데 갔다’고 해요. 이때까지 아버지만 믿고 살았는데 갑자기 없어졌으니, 그다음부터는 참, 죽지 못해 사는 거죠. 부대 내무반 구석에 담요 한장 깔고 한장은 덮고 쭈그려 있는데, 엄마 생각, 아버지 생각, 내 생각….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어요.” 김씨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가 하도 우니까 어떤 사람은 잠도 못 잔다고 날 꾸짖더라고요. 또 한편에서는 ‘놔둬라. 그 어린것이 부모가 그리워 그런걸, 실컷 울게 놔둬라’ 위로해주더라고요. 그 말을 들으니까 더 울음이 터지는 거예요. 그다음부터는 매일 울고 싶으면 밖에 나가서 실컷 울다 들어오고 이러니까, 부대에서도 그게 아마 (상부로) 보고가 된 모양이에요.”



이듬해인 1956년 봄, 부대는 김씨를 아버지가 억류됐던 ‘안가’(민가 위장 아지트)로 데려다주었다. 몇달 만의 재회였다. 아버지와 함께 지낸 기간은 길지 않았다. “거기서 서너달 있었나? 어느 날 군인들이 아버지를 지프차에 실어 데리고 나가요. 그때 아버지가 날 꼭 끌어안더니 ‘너는 꼭 살아야 한다. 이 사람들 하라는 대로 해라. 너는 꼭 살아야 한다.’ 그 말 남겨두고 가고는, 그게 마지막이에요.”



1956년 10월 어느 날, 아버지는 북파 공작대의 길잡이로 동원돼 휴전선을 넘었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부대는 그가 사망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들 김씨에게는 철저히 함구했다. 아버지 소식을 전혀 모른 채 혈혈단신이 된 김씨는 다시 교육대 아지트로 옮겨져 북파 요원들에게 함경도 사투리와 북한 노래를 가르쳐야 했다.



“그때는 아버지가 북파 된 거는 생각도 못 했고, 어떻게 하다 죽은 줄 알았어요. 물어보면 ‘작전 중이다. 곧 돌아온다’는 얘기만 하지. 자꾸 물어보니까 짜증 내더라고요. 그래서 더는 물어보지도 못하고…,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죠.”



이듬해인 1957년 봄, 부대 간부가 열다섯살 소년을 구슬렸다. “관계관이 와서는 ‘우리가 너를 이제 부대에서 키워서 기간요원을 시키려고 하는데 어떠냐? 우리 말만 잘 듣고 하라는 대로 하면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책임진다’ 그래요.” 그때부터 김씨는 독도법, 지형·지명 익히기, 철조망 돌파, 은신과 야숙, 지뢰지대 식별, 위험지역 포복 전진, 산악 행군 등 북파 침투와 정보 수집 활동에 필요한 각종 훈련을 몇달씩 반복 이수했다.



같은 해 8월, 부대는 김씨에게 ‘적진에 침투해 은신처 확보 후, 학생으로 가장하여 장전까지 가면서 해안 경비 상태, 초소 위치, 군항 실태, 주민 동향 등을 관찰한 뒤 복귀하라’는 임무를 내렸다. 그러나 먼저 침투한 다른 북파 요원이 북한군에 발각되는 바람에 작전이 중지되고 일행은 귀대했다. 근 70년 전의 일이지만 기억은 또렷했고 그의 진술은 국가를 상대로 한 소장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로부터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9월, 김씨는 다시 같은 임무를 부여받고 침투해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했다. 그 과정에서 암석지대를 통과하다 추락해 다치기도 했다. 김씨는 복귀 과정에서 북한군에 자수해 귀향하는 선택도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꼭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 같더라고요. 또 북쪽에 들어갈 때 겁을 줘요. 붙잡히면 총살이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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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북한 침투 특수부대원들이 가혹한 대우를 견디다 못해 무장탈영한 사건을 다룬 2003년작 영화 ’실미도’의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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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로 내치고 집요한 사찰





다시 해를 넘겨 1958년, 부대는 김씨를 약속대로 고등학교에 진학시켜줬다. 그러나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까지 책임지겠다”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59년도 12월인데, 나를 부르더니 ‘너 이제 사회에 나가라’ 그래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공작금에서 준다며 2만환을 줘서 내보내요. 그때 돈 2만환이면 쌀 한가마니 살 돈이에요. ‘절대 납치 얘기를 하면 안 된다. 전쟁고아라고 얘기해라. 너 뒤에는 항상 보안과 직원들이 따라다닌다는 걸 명심해라’ 해서, 각서 쓰고 지장 찍고 나왔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떡해? 어디에도 얘기하질 못하는 거죠. 그렇게 저녁에 딱 나오니 어디 갈 데 있습니까?”



김씨는 그날 밤을 학교 숙직실에서 지낸 뒤 다음날부터 친구 집에서 아침저녁을 얻어먹으면서 2만환 갖고 학비와 하숙비를 내면서 힘들게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했다. 1961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기댈 곳 하나 없이 막막했다.



“생각해보니까 군에 입대하면 의식주는 해결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군대를 지원했어요. 19살 때입니다. 그런데 면사무소 직원이 서류를 보더니 안 된다는 겁니다. ‘3대 독자’에다가 ‘○○○○부대 특수공작팀에 피랍돼 동 부대에서 생산’, 이렇게 돼 있더라고요. 먹고는 살아야겠고, 할 수 없이 농촌 다니면서 모내기도 하고 품팔이를 해가면서 살았어요. 그러던 중 1962년도에 학교 선배의 소개로 묵호에 있는 수산물 가공공장에 취직했어요. 직원이 8명, 조그만 회사예요.”



한국 사회에서 홀로 살아남기는 녹록지 않았다. 첫 직장을 잡은 직후엔 하숙집에서 소지품을 도난당했다.



“부대에 있을 때 찍었던 사진들, 중학교 친구들과 찍은 사진들, 고등학교 때 국회의원 표창장, 우등상, 졸업사진이랑 졸업장. 나 고등학교 가서 1등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다음에 칫솔·치약, 그리고 일기까지. 그걸 몽땅 하숙집에서 도둑맞았으니 남은 게 아무것도 없지.”



남한에서의 추억과 기록이 모두 없어진 데 이어 경찰의 감시는 끈질기게 이어졌다.



“일하고 있는데 하루는 사장이 불러서 ‘너 사회에서 범죄를 저질렀느냐? 무슨 조직에 가담했느냐?’ 물어요. 열흘이 멀다 하고 형사들이 와서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걸 봤느냐’ ‘근무시간에 몇시간씩 없어진 적이 있느냐’ ‘북한에 대해 자랑하거나 찬양하는 걸 들었느냐’ 묻는다는 거예요. 사찰을 한 거죠.”





김씨는 결국 3개월 만에 해고됐다.





“어디 가겠습니까? 속초로 올라와서는 겨울에 오징어배 탔어요. 미역 채취선도 타보고. 농촌에 가서 모심기하고 품팔이하고. 그런데 일자리를 옮기고 방을 얻으면 이 사람들(감시 경찰)이 어떻게 아는지 또 거기 와서 아주머니(방 주인)한테 ‘호구 조사’ 나왔다며 저에 관해 묻는다는 거예요. 하…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까지 꼭 해야 하는가? 그때는 참, 극단적인 생각도 여러번 했어요. 그때마다 아버지가 떠나면서 ‘넌 꼭 살아야 한다’며 꼭 끌어안던 게 생각나니, 그 말이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원동력이 돼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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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월11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북파 공작원 전사자 69기 위패 봉안식.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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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 정착





동가식서가숙, 근근이 살아가던 김씨의 남한 생활에 큰 변화가 찾아온 건 1968년, 스물여섯살 때였다.



“모심기하다가 점심을 먹는데, 아주머님이 신문을 가져와서 보니까 강원도에서 공무원 모집 공고가 있어요. 이건 기회다, 이것만 합격하면 사찰은 면할 거 아닌가. 피곤하고 배고픈 것보다도 사찰받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죽기보다 더 싫더라고요.”



그는 “운이 좋았는지 1, 2차 다 합격”했다.



“그때 기쁨이라는 건 말을 못 하죠. 그런데 1969년이 돼도 발령이 안 나는 거예요. 고성군 내무과에 물어보니 ‘신원 조회에 문제가 있다’고 해요. 아, 이것까지 사찰이구나. 그길로 옛 부대장을 찾아갔어요. 김동석 부대장이 강원도 삼척과 강릉 시장을 하다가 강원도 부지사로 와 있었거든요.”



김동석 예비역 대령(1923~2009)은 국군 첩보부대의 산파로, 맥아더·리지웨이·백선엽과 함께 미국 정부가 선정한 한국전쟁 4대 영웅이다. 부대장의 입김이 통했는지, 김씨는 1970년 1월 고성군 보건소로 발령이 났다. 당시 김씨는 지인의 소개로 함께 살던 지금의 아내와의 사이에 갓 태어난 딸이 있었다. “돈이 없어 결혼식을 못 올리고 있던 참인데, 첫 월급으로 5800원 받아서 그걸 가지고 혼례를 치렀어요. 하숙방에서 냉수 한그릇 떠놓고 맞절하는 걸로. 지금껏 면사포 한번 못 씌워줬어요.”



대한민국 공무원이 된 그는 성실함과 능력을 인정받았다. 보건소 근무 1년 반 만에 모범 공무원으로 선정돼 강원도(춘천 소재 강원도청 본청)에서 그를 발탁해 춘천에 새 보금자리를 꾸렸다.



“도청 민원실에서 4년간 근무하면서 자랑스러운 공무원 표창, 강원도 민원봉사반 표창, 강원도 청백리 표창, 이런 상들을 받으면서 두번 특진했어요. 그때 9급에서 6급까지 승진하려면 12~15년 걸렸어요. 그런데 나는 5년9개월 만에 6급이 됐습니다. 그러고는 1999년에 명예퇴직했어요.” 그의 나이 쉰일곱살이던 해였다. 그리고 ‘이제 과거는 잊어버리자’ 마음먹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엄마 얼굴이나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아버지가 어디 가서 죽었는지 그것만 알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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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와 그의 아내가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 관련 자료를 설명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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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죽음, 50년 뒤 알았다





그러던 중 2004년에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이 제정됐다. 김씨는 행방불명된 아버지와 자신까지 2명의 보상을 신청하기로 하고 가족에게 악몽 같은 인생사를 털어놨다. 김씨의 아내와 3녀1남 자녀까지 온 가족도 그제야 김씨가 ‘전쟁고아’가 아니라 ‘북한 출신 피랍자’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김씨는 보상 신청에 필요한 증거와 증언을 확보하려 옛 부대 간부들을 찾아다니던 중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북파와 사망 사실을 알게 됐다. 문제는 본인의 경우 납치와 북파 교육 및 임무 수행을 입증할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정식 에이전트가 아니라 교육훈련 차원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만 들었다.



김씨는 4~5년 동안이나 자신과 아버지의 보상을 위해 인우보증을 서줄 사람 2명을 물색했으나 번번이 좌절했다. 김동석 부대장 말고 한명이 더 필요한데, 하나같이 손사래를 쳤다고 했다. 김씨는 “너무 힘들어서” 결국 2009년에 자신 몫의 보상 신청을 취하했는데, 그러자 곧바로 아버지의 전사통지서를 비롯해 아버지의 보상 관련 증명서들이 나왔다. 이미 사망한 아버지의 유일한 상속권자로 보상금을 받았지만 김씨의 억울함과 돌이킬 수 없는 피해까지 보상을 받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지난해 2월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김씨는 깜짝 놀랐다. 자신처럼 북에서 납치돼온 김주삼씨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진실 규명을 근거로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는 소식이었다.



“아, 나도 이럴 때가 아니구나. 이때까지 내가 꾹 참고 살고, 하도 사찰이 심한 것에 데어가지고 여태까지 할 말 못 하고 살았는데, 나도 죽기 전에 원이라도 풀어보겠다고 해서 저와 아버지의 손해를 배상해달라는 소송을 내게 된 겁니다.”



소송 대리인 이강혁 변호사는 “김씨 부자의 사례는 보통사람들로선 믿기지 않을 만큼 황당하고 반인륜적인 사건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특수임무수행자 보상 신청 기록을 보면, 국군 특수부대가 이들 부자를 동시에 납치하고 아버지에게 북파 공작 활동을 강요해 사망에 이르게 한 기본적 사실관계는 국가가 팩트로 인정했다는 게 확인됩니다. 그에 대해선 큰 틀에서 다툼의 여지가 별로 없어요.” 이 변호사는 “특히 아버지가 이미 사망했는데도 아들한테는 이를 간교한 묵비로 숨기고 망자를 볼모로 삼아 이용했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극단적 테러 단체에서도 보기 힘들 만큼 용납할 수 없는 패륜 행위”라고 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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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7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서울 중구 사무실에서 조사 개시 3주년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진실화해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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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씨의 승소 여부는 불투명하다. 대법원은 진실화해위가 진실 규명 결정을 한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배상의 소멸시효를 인정하지 않는 판례를 세웠다. 그러나 현재 활동 중인 2기 진실화해위는 진실 규명 신청 기간을 2022년 12월에 마감하고 최종보고서를 준비하고 있다. 김씨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법으로 아버지 몫의 보상을 상속받은 데다, 자신의 북파 훈련과 임무 수행을 입증할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장벽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들어봤는데, 제주 4·3, 한국전쟁 시기, 납북자들뿐 아니라 우리처럼 북에서 피랍돼 나온 사람도 (진상규명 대상에) 해당하는 걸 몰랐어요. 알았으면 그때 (청을) 했겠지요. 그때까진 ‘피랍’이라는 거는 국가에서 인정하지도 않았고, ‘납남’(납북의 반대말)이란 용어 자체가 없는 거예요. 또 만약에 내가 발설하면 공안부(공안기관)에서 시달림받을 거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껏 일절 말을 안 하고 살았는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이라는 건 생각도 못 했고, 시효 만료니 뭐니 이런 건 더 몰랐죠.”



김씨의 억울함을 국가는 풀어줄 수 있을까? 김씨는 2021년 폐암으로 한쪽 폐를 완전히 제거한 상태다. 장시간 인터뷰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무리였지만, 그는 두시간이 넘도록 평생 맺힌 한을 쏟아냈다.



“제가 소소한 건 참 얘기 안 하는 성격이에요. 가족한테도 이야기 안 하고 혼자만 속에 담고 있다가, 오늘 기자님한테 이렇게 털어놓으니까 속이 터지는 것 같습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이제는 나 같은 비극을 겪는 사람이 더 나오지 않겠지요? 나오면 안 되고….”



춘천/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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