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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이나미의마음치유] 끝, 저 너머에서 오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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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은 이후의 주변에 대한 상상 / 반성과 함께 현재를 더 신중하게 만들어

세계일보

나이가 들면서 일상이 된 것 중 하나가 상갓집 가는 일이고, 안팎으로 접하는 소식에서도 죽음과 관련된 일이 더 잦아지는 것 같다. 어떻게 죽을까, 타인의 죽음을 어떻게 대할까가 피할 수 없는 현실적인 숙제가 된 모양이다. 담담하지만 진지하게 죽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태도를 어떻게 갖춰 나가야 할지 고민도 많이 된다.

한편으로 돌아가신 분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그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기억에 대한 감사함도 있지만, 이승에서는 더 이상 그들과 함께 아무것도 나눌 수 없으니 그립고 아쉽다. 심리학이나 인류학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이런 복합적인 심정이 투사(projection)된 것이 종교성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내 곁에 머물지 않는 이들을 소환해 내는 제사, 미사, 불사 등이 공통적으로 죽고 난 후에 좋은 곳에 가기를 기원하고 또 살아남은 자를 보살펴 달라는 메시지를 담기 때문에 나온 이론인 것 같다.

많은 과학자가 영혼이란 육체의 물리 화학적 작용에서 나오는 에너지에 의한 부수적인 현상이라고 말하지만, 소크라테스,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 대부분의 철학자나 신학자들은 영혼이란 육체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영혼이 물질에서 기원하는 현상에 불과하다 치면 죽음은 소멸에 불과하기 때문에 철저히 현실논리에 근거한 물질 지향적 삶을 살게 되기 쉽다. 그러나 몸은 육체가 잠시 머무는 그릇일 뿐이고, 죽음을 뛰어넘는 세계를 믿게 되면 종파적 신념과 상관없이 자신과 타인의 삶 너머 존재하는 불멸의 가치를 더 존중하게 될 것 같다.

육체와 상관없는 독자적인 영혼의 존재에 대해 부정한다 해도, ‘미래의 죽은 나’가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상상은 ‘현재의 나’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과 중심을 잃지 않는 태도를 지니는 데 도움이 된다. 많은 것을 행복하게 나누고 내게 베풀었건만, 내가 죽은 이후엔 나 없이 살아내야 하는 이들을 배려하고 살피게 만들기도 한다. 현재에 대한 집착과 나 중심적인 갇힌 사고를 확장시키는 매우 가치 있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사라진 이후의 주변에 대한 상상은 그동안 ‘내가 쌓아온 업보’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현재를 더 신중하게 만들기도 한다.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준 것은 아니었는지, 내 아집이 다른 사람을 숨 막히게 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알게 모르게 저지른 크고 작은 실수는 또 얼마나 많은지…. 아슬아슬한 고비에도 이렇게 살아있는 까닭은 그동안 저지른 많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제대로 된 씨앗을 뿌려 내 뒤에 살아남는 이들을 위해 사랑과 행복을 남겨주기 위해서일지 모르겠다.

지금보다 더 미숙했던 시절에는, 지치고 절망할 때면 내가 벌여 놓은 것에 대한 부담으로 죽음을 향해 도망가는 건강하지 못한 상상이 불쑥 떠올라 마음이 크게 요동치곤 했다. 다행히 어느 시점부터는 결국 모든 것은 다 사라진다는 시간적 제한이 역설적으로 절망과 좌절로부터 나를 좀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다만 나같이 깨닫지 못한 사람이 초고령자가 되면 인생은 더 고되거나, 지겹거나, 외롭게 변할 게 분명한데 사랑하는 사람, 익숙한 환경, 싱싱한 열정이 모두 사라진 다음, 내 한 몸만 남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도 싶다.

이나미 서울대병원 교수·정신건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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