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1 (수)

처칠과 달리가 사랑한 술… '별'을 삼킨듯 차갑고 황홀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돔 페리뇽' 17세기 佛 수도사가 만든 샴페인… 英 여왕 등 유명인 축배주로 쓰여

새 디렉터로 입성한 벵상 샤프롱, 17년 숙성한 신제품 시음회 열어 "나이들수록 깊어지는 게 와인"

조선일보

밤하늘엔 별이 빽빽했다. 불빛 하나 없는 바닷가엔 파도 소리가 들어찼다. 프랑스 샴페인 돔 페리뇽의 새 지휘자(Chef de Cave) 벵상 샤프롱(43)이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별을 마셔봅시다. 하늘의 별이 혀끝으로 부딪힐 겁니다. 느끼세요. 별들의 맛을!"

시음이라기보단 낭송이었다. 돔페리뇽이 17년을 숙성해서 새로 내놓은 샴페인 '돔 페리뇽 빈티지 2002 플레니튜드 2'〈작은 사진〉를 발표하는 자리는 여러모로 낯설고도 별났다. 그 누구도 '샴페인' 세 음절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별"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이날 하와이 빅아일랜드 바닷가에서 열린 만찬의 이름도 '드링킹 스타스(Drinking Stars)'. 식사 끝 무렵엔 프랑스 천문학협회장 알랭 시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약 이 자리에 철학자 플라톤과 아르키메데스, 그리고 수도사 피에르 페리뇽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도 별 이야기를 할 겁니다. 지금 우리도 저 별들을 보게 되는 것처럼요." 고개를 들었다. 거짓말처럼 머리 위엔 북극성이 걸려 있었다.

◇별을 삼키는 시음회

1668년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 있는 베네딕도회 소속의 오빌레 수도원엔 서른 살을 갓 넘긴 수도사 피에르 페리뇽이 있었다. 그는 시력이 좋지 않았지만 미각만큼은 날카롭고 예민했다. 47년 동안 성심을 다해 성배에 사용하는 미사주를 만들었던 그를 훗날 사람들은 돔 페리뇽이라고 불렀다. 돔(Dom)은 성직자의 최고 등급인 다미누스(Dominus)를 줄여서 부른 것이다. 피에르가 가꿨던 와인 밭과 저장고는 훗날 모엣&샹동이 인수, 오늘날의 '돔 페리뇽'이 됐다. 이들이 내놓는 샴페인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대관식,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세자빈의 결혼식 등에 쓰였고, 마크 트웨인·살바도르 달리·윈스턴 처칠부터 현존하는 가장 비싼 작가 중 하나인 제프 쿤스가 각별히 사랑하는 축배주가 됐다. 살아생전 피에르 페리뇽은 한겨울에 와인 저장고에 갔다가 폭발해 버린 와인을 마시며 샴페인을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 그는 동료 수도사들에게 "형제님, 제가 지금 별을 마시고 있어요!"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신제품을 굳이 하와이 빅아일랜드 해변에서 공개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벵상 사프롱은 "하와이는 오랜 화산활동으로 끊임없이 변했고 지금도 생동한다. 이 검은 화산섬에선 지금도 용암의 흔적과 별과 바닷물이 부딪친다"고 했다. 샴페인 맛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이렇게 공을 들이는 것. 고도의 마케팅 혹은 첨단의 상술이지만 그래도 감탄이 나왔다. 별과 철학과 천혜의 자연을 포장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조선일보

검은 현무암이 끝없이 깔린 하와이 빅 아일랜드의 해변으로 노을이 번진다. 올해 돔 페리뇽의 새 디렉터(Chef de Cave)로 취임한 벵상 샤프롱이 17년 숙성한 새 샴페인을 잔에 담아 들고 걸어왔다. 이윽고 어둠이 깔리자 이곳은 별천지로 변했다. /돔 페리뇽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시간과 인내는 늙지 않는다

돔 페리뇽의 일반 빈티지 샴페인은 보통 7~8년을 숙성하지만 '플레니튜드 2'는 17년쯤 저장고에 묵혔다가 꺼낸다. 음식은 숙성하면 대개 맛이 보드랍고 약해지지만 제대로 무르익은 샴페인은 강렬하고 농익은 생기를 발산한다. 샤프롱은 "나이 듦(aging)이 아니라 절정으로 향해 가는 길"이라고 했다. '플레니튜드(plénitude)'의 뜻도 절정이다. 샤프롱은 "시간과 날씨를 이해하고 인내할 때 우리는 때론 반대의 길을 가게 된다"고 했다. "2002년의 프랑스 샹파뉴 겨울은 온화했습니다. 봄은 건조하고 따뜻했죠. 극과 극을 치닫는 날씨 덕에 농밀하고 다디단 포도가 나왔어요. 금속이 연금술을 거쳐 금이 되듯, 긴 숙성 끝에 이 포도가 술이 됐고요. 어떤 것은 나이 들수록 반짝입니다." 나이 듦이 때론 활력의 동의어가 될 수 있음을 이날 알았다.





[하와이=송혜진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