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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Weekend Interview] 블록버스터 게임브랜드 `마비노기` 만든 김 동 건 넥슨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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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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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게임 역사에서 '마비노기'라는 이름을 빼놓기는 어렵다. 2004년 첫선을 보인 뒤 어느덧 서비스 15주년을 맞은 마비노기는 국내 최대 게임사 넥슨의 대표적인 장수 게임이자 액션 RPG '마비노기 영웅전', 모바일게임 '마비노기 듀얼' 등 수많은 차기작을 거느린 게임 브랜드가 됐다.

이 마비노기를 탄생시킨 인물은 넥슨 데브캣스튜디오 총괄 프로듀서로 재직하고 있는 김동건 프로듀서(44)다. 김 총괄 프로듀서는 고등학생 시절 컴퓨터 프로그래밍 경진대회에 나가 대상을 탈 정도로 전도 유망한 프로그래머 꿈나무였다. 당시만 해도 '전자 오락'이라는 이름하에 아이들 공부를 좀먹는 방해물로 여겨지던 게임에 푹 빠졌던 그는 결국 게임을 만드는 일에 자기 인생을 바쳤다. 그는 인터뷰 내내 수줍은 표정으로 조용히 말을 했다. 그가 '마비노기'를 만든 것도 자신처럼 내성적인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면서 즐길 수 있는 게임을 만들겠다는 작은 바람 때문이었다.

어느덧 휘하에 수많은 개발자들을 거느린 스튜디오의 책임자가 되었지만 여전히 김 총괄 프로듀서는 직접 게임을 기획하고 그림도 그리는 현역 개발자로 살아가고 있다. 판교 넥슨 본사에서 만난 김 총괄 프로듀서는 이제 한국 게임의 과거 경험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만들어나가자며 후배들을 위한 활동에 바쁜 모습이었다. 김 총괄 프로듀서는 WHO 질병코드 지정 등 최근 게임계가 맞닥뜨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진 개발자라면 여전히 재미와 의미를 갖춘 게임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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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컴퓨터에 푹 빠진 아이였다고 들었다.

▷아파트 같은 라인에 사는 친한 형 집에서 컴퓨터를 처음 만났다. 그 형 아버지가 실과 선생님이셨는데, 방학 동안에 배워서 애들 가르친다고 가져온 것이다. 화살표 키가 신기해서 눌러보고 하다가 재미있어서 하루 종일 그 집에 붙어있었다. 심지어 그 가족이 휴가를 갔을 때도 열쇠를 받아 혼자서 했을 정도다. 결국 어머니께서 용돈을 모아 직접 사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 저축상을 받을 정도로 용돈을 꼬박꼬박 모으고, 나머지는 어머니가 보태주셔서 애플 컴퓨터를 4학년 때 처음 샀다. 한국에 퍼스널 컴퓨터가 처음 들어왔을 무렵이다.

―프로그래밍 경진대회에 나가려면 컴퓨터를 직접 싸들고 가야 했다는데.

▷장충체육관에서 본선을 진행했는데 본체뿐 아니라 모니터까지 파란 보자기에 싸서 대구에서 서울까지 들고 왔다. 경진대회에 나가보니 다들 16비트 컴퓨터를 쓰는데 나만 8비트 컴퓨터를 쓰고 있더라. 부모님이 보시고 속이 상하셨는지 집에 내려와서 286 16비트 컴퓨터를 100만원 넘는 돈을 주고 사주셨다.

―컴퓨터로 개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다양한데 왜 하필 게임이었나.

▷컴퓨터로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의 꽃이 게임이다. 게임은 그래픽이든 사운드든 최첨단 기술이 들어가고, 소설이나 영화 등 여러 미디어가 하나로 뭉쳐지는 상품이다. 또 게임을 잘한다는 개념 자체가 컴퓨터를 이겨내는 것 아닌가.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게임 만든 이가 낸 수수께끼를 푸는 느낌도 받을 수 있다.

―정작 학과는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를 택했다.

▷전산과를 갈까도 생각했지만 프로그래밍 테크닉만으로 게임을 만들 수 없다는 걸 알았고 디자인이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산업디자인학과에서 배운 지식들이 크게 도움이 됐다. 그때가 마침 산업디자인 관련 학문에서도 제품 껍데기를 만드는 것보다 인터페이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가 막 나오던 시기였다.

―직접 게임을 만들어보니 어땠나.

▷학교를 배경으로 한 슈팅게임을 이은석(넥슨 왓스튜디오 총괄 프로듀서)과 만들었는데 PC통신에서 유명해졌다. 이후 PC통신에서 게임 1세대인 김학규(IMC게임즈 대표), 이현기(넥슨 디렉터) 등과 의기 투합해 메카닉 액션 게임을 만들자고 했는데 다들 바빠서 함께 못하고 혼자 3년 정도 걸려 PC패키지 게임 '크레센츠'를 만들어 3000장 정도 팔았다. PC통신상에서 게임에 나오는 대사를 다 외워서 업로드하는 분들도 있었고, 개발자인 나에게 편지를 보낸 분도 있어서 뿌듯했다.

―넥슨에 입사해 국내 최대 게임사를 만드는 데 공헌했다.

▷넥슨이 어떤 회사인지도 몰랐고 입사할 생각도 없었다. 다만 온라인 게임을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찾아보니 넥슨이 '바람의 나라'를 모뎀을 통해 서비스하고 있었다. 넥슨 다니는 선배에게 물어봤더니 그냥 와보라고 했다. 그때가 12월 31일이었는데 내일 출근하라고 하더라. 1월 1일 아니냐고 묻자 게임은 365일 서비스하는 거라고 했다. 막상 출근했더니 문이 닫혀 있어 부대찌개 사먹고 집에 돌아갔던 기억이 있다(웃음). 결국 3일부터 공식적으로 출근을 해서 지금까지 다니게 됐다. 새로운 시도를 해도 막지 않고, 만들고 싶은 게임 만들게 해주는 넥슨 분위기와 잘 맞았다.

―입사한 뒤 4년이 지나 '마비노기'로 성공했다. 어떻게 준비했나.

▷처음에 입사하니 아무도 일을 안 시키더라. 기획서를 써서 김정주 넥슨 회장한테 내기도 하고, 휴대폰 게임 만드는 알바생을 규합해 무선사업팀이라고 이름붙이고 국내 최초 모바일 MMO(다중역할온라인게임)인 '코스노모바'를 개발하고 그랬다. 그런 식으로 경험과 신뢰를 쌓은 뒤 시작한 게 '마비노기'다. 학교 다닐 때부터 PC통신 게시판에 보면 언제나 접속해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 소위 '죽돌이'라고 하는 친구들인데, 그렇다고 활발하게 말을 걸고 그러진 않는다. 그런 내향적인 사람들도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게임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초기 기획 단계부터 친절하고 다정한 게임을 만들려고 했다.

―게임이라는 상품은 성공과 실패 간극이 크다.

▷한창 일할 때는 온라인 게임 성장기여서 두려움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이 생각하는 게임을 만들면 그 분야 선구자가 되는 상황이었다. 내가 만든 마비노기도 소셜 커뮤니케이션 느낌을 주는 최초의 MMO 게임으로, 다양한 게이머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었다. 지금은 워낙 게임이 다양하고 경쟁이 치열한 시기라 얘기가 다르기는 하다.

―공을 들인 게임이 시장에서 외면을 받으면 마음이 아플 것 같다.

▷모든 게임이 아픈 손가락이지만 게임 만드는 전체 과정을 옆에서 보니 실패해도 이해가 된다. 예를 들어 '허스키 익스프레스'라는 게임은 프로듀서로서 처음 맡은 프로젝트였는데 콘셉트에서는 호평을 받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이라 오락가락했던 것 같다. 게임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변수가 많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

―성공과 실패를 공유하자는 이야기를 계속 했는데.

▷TV에 나오는 유명 셰프들도 자기 레시피를 다 알려주지 않나. 약간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알려주고 있다. 지금 우리 스튜디오에서도 '내가 하는 작업을 자랑하자'라는 말을 표어처럼 내걸고 그룹웨어로 각자 작업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정제해서 매년 열리는 넥슨개발자컨퍼런스(NDC) 같은 곳에서 공개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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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건 넥슨 데브캣스튜디오 총괄 프로듀서가 판교 넥슨 본사 출입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게임 개발자 면모는 무엇인가.

▷시대별로 다르지 않을까. 내 취미 중 하나가 옛날 게임을 모으는 것인데, 이런 게임 패키지를 보면 개발자 사진이 있다. 공대 느낌 나는 아저씨 몇이 웃고 있는 사진이 있고 본인 이름을 넣은 게임 이름이 있다. 그때는 슈퍼맨처럼 모든 것을 다 다룰 줄 알고 아주 광적인 사람이어야 게임을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게임이 독주라면 지금은 수많은 개발자들이 오케스트라처럼 각자 전문성을 가진 부분에 집중하면 된다. 그럼에도 시대를 가리지 않고 유효한 공통적인 부분은 '사람에게 관심이 많은 개발자가 더 좋은 개발자'라는 점이다. 내가 어릴 때 게임은 컴퓨터와 대결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유저끼리 대결한다. 또한 게임은 이제 일상이다. 게임이 유저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유저가 뭘 기대할지 생각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을 많이 관찰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한다.

―게임 플랫폼도 PC와 콘솔 외에 SNS, 스마트폰 등으로 바뀌고 있는데.

▷사람을 생각하라는 말이 그런 부분이다. 막연히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이렇게 하겠지 하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요즘 사람들이 게임을 즐기는 가장 대중적인 방식이 뭔지 아나. 게임을 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는 것이다. 그래서 e스포츠가 갈수록 인기를 끌고, 모바일게임 등에도 자동플레이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게임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냥 구경하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야구선수만 야구인이 아니라 즐기는 팬들도 다 야구인인 것처럼 게임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게임과 교육 등 다른 산업군과 경계도 모호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섯 살인 내 딸에게 태블릿을 주면 이것저것 하면서 잘 논다. 물론 본인은 게임을 즐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숫자 공부를 시키고 있는 거다(웃음).

―한국 게임업계는 중국 등에서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데.

▷어떤 산업이든지 발전 과정에서 사회와 충돌하면서 질타도 받게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접점을 찾으며 성숙하는 거다. 게임도 그런 단계가 아닐까. 우리 게임이 성공한 것은 미국과 일본 게임의 장점을 잘 융합해 온라인에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중국에 밀리거나, 미국 시장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할 때다.

―최근 이슈가 됐던 WHO 게임 질병 코드 등록도 불안 요소로 떠올랐다.

▷사회에서 게임 영향력이 커진 만큼 책임을 묻는 질책이 따라온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국가나 사회의 필요에 따라 게임의 역할은 달라지지만 지금은 글로벌 스탠더드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본다. 다만 규제에 일관성은 있어야 한다. 다른 산업에 비해서 과한 규제를 하거나, 불량 상품을 대하듯이 볼 때 게임업계에서 일하는 이들은 기운이 빠진다.

―개발자로서 남은 꿈이 있다면.

▷계속 게임을 만들 것이다. 다만 어떤 게임을 만들지 나도 모른다. 어떤 게임을 만들어야지 하고 벼르지도 않는다. 인디 게임 개발자들 돕는 일도 하고 싶다. 그런 토양이 있어야 좋은 게임도 나올 것이라 믿는다.

▶▶He is…

1974년 대구에서 태어나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디자인학과와 동 대학원을 마쳤다. 컴퓨터가 일반에 공급되기 시작한 초등학생 시절부터 컴퓨터와 게임에 관심을 가졌다. 각종 프로그래밍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고 고교 시절 직접 게임 제작에 나섰다. 2000년 넥슨에 입사한 뒤 마비노기 시리즈를 만들며 한국 온라인 게임산업의 성장을 이끈 주역이 됐다. 후배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나크'라는 아이디로도 유명하다. 현재는 넥슨 데브캣스튜디오의 총괄 프로듀서로 재직하면서 새로운 게임을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이용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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