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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5·18시민군 대변인 아들 곁으로 떠난 5월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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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동 전 5·18유족회장 16일 오전 별세

윤상원 열사 부친…5·18진상규명 헌신


한겨레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활동한 윤상원(1950~80) 열사의 부친 윤석동 전 5·18민주유공자유족회장이 16일 오전 9시51분 별세했다. 향년 93.

고인은 5·18민주화유공자회 회장을 맡아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해 헌신했다. 아들 상원은 1980년 5월27일 새벽 시민군의 거점이었던 옛 전남도청에서 계엄군과 맞서 싸우다 숨졌다. 1982년 4월 윤상원과 그의 들불야학 동지였던 박기순의 영혼결혼식 이후 두 사람의 넋풀이를 만들어진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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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송정리 농업실습학교에 다니던 17살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평생 기록을 남겼다. 윤씨는 떠나간 아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일기에 적었고, 5·18민주화운동 관련 각종 신문 기사를 오려 첨부했다. 윤상원 열사도 고인의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때부터 쓴 일기를 남겼다. 윤씨는 아들 죽음의 역사적 의미를 점차 이해하고 5·18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씨의 서울 연희동 자택 앞을 찾아가 농성을 하는 등 5·18진상규명에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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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엔 5월의 아버지로 살아온 아픔도 적혀 있다. 아들의 음력 제삿날에 쓴 일기엔 “상원이 제일(제삿날)이다. 이토록 허망할까? 산 자들은 무엇을 하여 왔는가. 광주 문제가 진상규명되고 역사에 바로 반영될 때에 (상원이 삶도) 빛을 보게 될 것”(1993년 6월2일)이라고 적었다. 전씨가 사면복권됐을 때는 “우리 유족회에서도 인정하기로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를 하였다. 당신들이 과거를 반성하고 앞으로 국민 대통합에 협력하여 주기를 바란다”(1997년 12월20일)는 심경을 남겼다. 이 대목엔 5·18책임자 처벌이 미흡하다고 생각했지만, 대승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기로 한 심경이 녹아 있다. 하지만 전씨가 지난 3월 고 조비오 신부를 명예훼손한 혐의(사자명예훼손) 혐의로 형사재판을 받기 위해 광주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던 고인은 “나쁜 놈은 나쁜 놈대로 벌을 받어. 죄를 안 짓고 살아야지”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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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씨는 논농사와 감나무 재배, 축산·양봉을 하며 평생 7남매를 가르쳤다. 먼저 간 아들이 생각날 때면 혼자 무등산에 올라 시내 풍경을 바라보곤 했고, 현대사 관련 책을 사서 읽기도 했다. 신장투석 등으로 수년동안 지병을 앓았던 고인은 지난 해 5월 휠체어를 타고 국립5·18민주묘지를 찾기도 했다. 당시 고인은 아들의 비석을 애틋하게 쓰다듬으면서 “인자 곧 죽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아들 비석을 만져보고 싶어 왔어”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고인은 지난 15일 밤 손글씨로 “내일 간다”고 적은 뒤, 자녀들에게 “그동안 고생했다.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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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은 배우자 김인숙씨, 아들 웅원(대원건업)·태원(㈜한양 전무)씨, 딸 정희·경희·덕희(봉주초 교사)·승희씨, 사위 전남구·이기홍·나창영(목포대)·송인엽(대구광역시청)씨 등이 있다. 빈소는 광주 브이아이피(VIP)장례식장 301호, 발인은 18일 오전 9시다. (062)521-4444.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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