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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학습·실험·발표 동시에 하는 과학수업… 어려운 물리도 ‘쏙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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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미래교육' 현장보고서 / ⑦ 경기 고양시 저현고등학교 르포 / ‘창의융합 과학실’ 모델 지정 공간 혁신 / 교실 네 구역으로 나눠 이동하며 학습 / 이론 실생활에 응용 자기 주도적 수업 / ‘충격량·운동량의 관계’ 물리개념 공부 / 충격완화장치 ‘갑론을박’ 토론 후 제작 / 실험 데이터 태블릿PC 입력 가설 입증 / “로봇이 대체 못할 인간 고유 특성 중요 / 韓교육 무조건 제도로만 해결하려고 해 / 교육 주체인 교사들 좀 더 믿어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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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고양시에 있는 저현고등학교 학생들이 지난달 16일 오후 창의융합형 과학수업에서 ‘스마트카트’를 이용해 충돌시간과 충격량의 관계를 실험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학생들이 스마트카트와 연결된 태블릿PC에서 실험 결과를 확인하는 모습. 고양=이제원·이동수 기자


“선생님 에어컨 안 틀어요?”

지난달 16일 오후 2시쯤.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교실에 들어선 경기 고양시의 저현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말했다. 5월에 느닷없이 찾아온 낮 최고기온 30도의 더위에 지친 학생들의 투정에 고민성 교사는 “내가 틀어줄 수 있는 게 아니야”라며 아이들을 달랜다.

이날 저현고 3층 창의융합교실에서는 물리 수업이 진행됐다. 수업 시작 직전 김민호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교실 뒤편을 서성이는 기자를 향해 말을 걸었다. “기자님, 제가 수업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드려도 되겠습니까?” 기자의 당황한 기색에도 김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충격량과 운동량의 관계를 이해하고 일상생활에 충격을 감소시키는 예시를 찾는 수업인데요, 실험도 하고 토론도 거쳐서 발표할 예정입니다”라고 말했다.

저현고는 교육부와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지원하는 ‘창의융합형 과학실 모델학교’다. 창의재단에서 지원하는 학교는 전국 120개교 정도다. 모델학교에 선정되면 첫해 공간혁신비로 4500만원을 받고 이후 매년 운영비로 1000만원을 지원받는다.

이날 수업에선 서너 명의 학생이 한 조를 이뤄 발표·실험·학습·토론 및 창작 등 네 구역으로 나뉜 교실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학습 주제는 충격량이 같을 때 충돌시간과 충격력의 크기가 반비례함을 알고 충격완화장치를 만들어 실생활에 적용하는 것. 고교 교육과정인 ‘물리학1’의 ‘역학과 에너지’ 단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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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를 짰지만 학생들은 조별 활동에 구애받지 않았다. 자신이 단원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구역에 가서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했다. 학습영역은 충격량과 관련된 영상을 시청하고 온라인을 통해 다양한 충격완화장치를 검색해 특징을 익히는 구역이다. 실험구역은 직접 충격량을 실험할 수 있는 ‘스마트카트’와 실험 결과가 전송되는 태블릿PC가 주어져 ‘충격력과 충돌시간은 반비례한다’는 가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곳이다. 토론 및 창작 구역에서는 실험 전 충격력을 가장 많이 줄일 수 있는 충격완화장치를 두꺼운 종이를 사용해 제작하는 공간이다.

토론 및 창작구역에 도착하니 책상 위 부풀린 딱지 모양, 원통형 등 학생들이 제작을 시도한 다양한 충격완화장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쪽에선 두 학생이 한 장치를 사이에 두고 갑론을박을 이어갔다. 두꺼운 종이를 원통형으로 이어붙이고 원통 내 빈 공간을 골판지로 만든 스프링으로 꽉 채운 충격완화장치다. 토론 주제는 충격력을 줄이는 데 빈 공간의 필요성 여부다. 스프링 모양의 골판지를 채워 넣은 장치를 사용하면 스마트카트가 충격력 측정기에 충돌할 때 충돌시간을 늘려줄 수 있다는 주장과 골판지 스프링으로 빈 공간을 채우면 오히려 측정기에 충격력이 더 잘 전달될 것이라는 주장이 맞섰다.

끝이 안 보이던 토론은 물리부장을 맡은 노현웅군의 한마디로 정리됐다.

“직접 해보고 데이터로 말합시다.”

학습영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청각 자료 등이 갖춰진 교실 내 별도 공간이 학습영역으로 지정됐다. 여기도 ‘싸움’이 났다. 남학생 4명이 빨간불에 길을 건너는 보행자가 차에 치인다면, 어떤 종류의 충격완화장치를 써야 하느냐는 주제로 치열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토론을 지켜만보던 한 학생이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보호해야 하는 쪽이 보행자야, 운전자야?” 순간 네 학생의 말문이 막혀 침묵이 이어졌지만, 어느새 방 안 열기는 달아올랐다. 보행자가 빨간불에 길을 건넜으니 운전자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쪽, 그래도 부상 위험이 큰 보행자부터 지켜야 한다는 쪽, 당연히 둘 다 다치지 않아야 한다는 쪽으로 파가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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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커지자 고 교사가 학습영역에 도착했다. 학생들의 설전에 귀 기울이던 고 교사는 “우리 수업목표가 뭐죠?”라며 개입했다. 머뭇거리는 학생들에게 그는 “충격력을 최대한 완화하는 게 목표”라고 일러줬다.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토론을 이어갔다.

실험영역에 모여든 학생들은 모두 허리가 굽었다. 책상 위 스마트카트를 바라보며 토론 및 창작구역에서 만든 충격완화장치가 실제 얼마나 충격력을 줄여주는지 실험하고 있었다. 자신이 세운 가설을 데이터로 증명하는 단계다. 여기저기서 “내 말이 맞잖아”라는 자랑이 터져 나왔다. 으스대는 친구 옆에서 뾰로통한 얼굴을 한 한 학생은 “아!”라는 외마디 외침과 함께 방금 떠올린 충격력 완화 아이디어를 친구에게 공유했다. “그러면” “그랬을 때”를 몇 번 외치던 이들은 다시 창작구역으로 돌아가 두꺼운 종이를 자르기 시작했다.

수업을 마친 뒤 수업 시작 전 굴욕(?)을 안겨준 김군에게 소감을 물었다. 김군은 “흔치 않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충격량을 실생활에서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지 배웠고, 태블릿PC로 직접 충격력을 수치로 확인할 수 있어서 만족합니다”라고 말했다. 김군의 ‘준비된 대답’이 마냥 웃긴 주변 친구들에게 혹시 학교에서 수업 참관에 대비해 김군을 섭외해놨느냐고 물었다. “쟤 원래 저래요. 반장이라서.” 학생들은 웃음꽃을 피우며 교실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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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융합형 과학교실을 운영하는 저현고등학교 홍지혜 부장교사(왼쪽), 고민성 교사가 지난달 16일 경기 고양시 저현고 교실에서 ‘4차 산업혁명과 미래교육’을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이동수 기자


◆“4차산업혁명 필요한 능력은 창의력·적응력·인성”

“아이들에게 ‘알파고’, 그림 그리는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의 특징을 보여주고 ‘너넨 어떻게 할래’라고 물었다. 학생들 스스로가 가장 필요하다고 느낀 능력 세 가지가 창의력, 적응력, 인성이었다.”

지난달 16일, 경기 고양시에 있는 저현고등학교의 창의융합 과학실에서 만난 고민성 교사가 말했다. 고 교사는 “이유를 물어보니 로봇으로도 대체 불가능하게끔 창의성을 기르고, 사회가 급변하니까 적응력을 키우고, 기계와 인간이 혼재한 상황에서 ‘나는 누구인가’ 구별할 수 있는 인성을 길러야 한다고 하더라”라고 설명했다. 수많은 교육 전문가가 강조하는 미래교육의 특징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앞으로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정해져 있다는 얘기다.

홍지혜 부장교사는 “4차 산업혁명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느낄 필요는 없다”며 “그럴수록 교육의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저현고는 2년 전 교육부와 한국과학창의재단이 주관하는 ‘창의융합형 과학실 모델학교’에 선정돼 첨단 실험장비, 태블릿PC 등을 갖추고 있다. 홍 교사는 그러나 “첨단 기기로 교육한다고 해서 미래교육이 아니다. 모든 교육은 원래부터 미래교육”이라며 “아이들이 학교를 벗어나 사회로 편입됐을 때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나가는 자세,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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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교육을 얘기할 때면 교육이 나아갈 방향도 정해져 있지만, 해결책도 항상 같다. 한국의 경우 대학입시 위주의 교육과정, ‘학벌 지상주의’가 팽배한 사회 분위기를 고쳐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선뜻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당장 고쳐나갈 수 있는 부분은 없을까.

고 교사는 ‘교사의 자율성 확대’를 꼽았다. 그는 “저현고 수업이 대부분 학생 참여형이다. 1∼2학년 때는 학생도 학부모도 매우 좋아한다. 그러나 입시 준비가 본격화하는 3학년에 올라가면 ‘공부 안 시켜줬다’는 원망이 나온다”라며 “학생·학부모·교사, 교육의 3주체가 서로 믿음을 가져야 하는데 지금은 문제가 불거지면 학생과 학부모가 일방적으로 교사에게 책임을 묻는 구조로 돼 있다. 또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무조건 ‘제도 변화’이다. 교사들의 숨통이 조여질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대다수 교사는 마음의 여유를 주면 더 나은 수업에 대해 고민하기 마련”이라며 “교사를 좀 더 믿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동수 기자 ds@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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