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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6 (수)

미소속에 비친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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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진 출처 :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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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슬픈 일이 있었어."
슬펐다던 엄마는 느긋하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어제 병원에 들른 김에 혈압을 쟀거든. 평소보다 너무 낮은거야. 그래서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고 물어봤어. 좀 바쁜것 같긴 하더라마는. 그랬더니 할머니 신경쓰지 마세요. 늙으면 원래 혈압이 오락가락해요. 하고 홱 가버리는거야. 망할 것! 화가 부륵 났다가 문득 슬퍼지더라. 아, 화낼 일이 아니구나. 내가 이제 진짜 살만큼 산 노인이로구나. 그걸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구나 싶었어. 그제서야 실감이 되더라. 늙었다는 게."
엄마는 여든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쉰을 앞두고 있다. 나는 목울대를 세워가며 배려라곤 없는 불친절한 간호사를 흉봤다.
"엄마, 그 병원 어디야? 다신 거기 가지 마!" 부러 눈을 부라리는 날 보며 엄마는 잠시 소리내어 웃었다. 미소는 따뜻한데 어딘지 쓸쓸했다. 생의 비밀을 알아버린 초연함, 삶의 거울 앞에서 깨닫는 어떤 경지. 말없는 미소가 백마디 말을 했다.

미소가 울음보다 깊을 때가 있다. 아플 때가 있다. 그 날 엄마의 미소가 그랬다. 그리고 그런 미소를 다시 맞닥뜨렸다. 국립 중앙 박물관의 영월 창령사터 오백 나한전에서. 고려 시대의 돌사람들 전시다. 이번 전시에는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이라는 부제가 붙었다. 줄까지 서서 입장한 특별 전시실은 온통 어두웠다. 사위가 어둔 가운데 오도카니 한 자리씩 차지한 오백 나한들. 생각에 잠긴 나한, 돌 뒤에 앉은 나한, 가사를 두른 나한, 웃는 나한, 슬픈 나한, 화난 나한, 끄덕이는 나한 등 모두의 표정이 달랐다. 우리의 얼굴이 제각각이듯 그들도 전부 달랐고 삶도 그랬을 것이다. 세월을 뛰어 넘어 돌사람들이 말을 건넸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삶은 생각보다 간단하다고. 굳이 어렵게 왜곡시키지 말라고.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얼굴은 몇 개 안된다고. 마음 안에서는 백팔번뇌가 일어난다지만 우리는 스스로의 얼굴을 선택할 수 있다고. 웃을지 울지 네가 정하라고.

엄마는 늘 웃는 얼굴을 택했다. 그래서 나도 따라 그리 되었다. 우리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창덕여고 문예반 반장에 이화여대 불어불문과 출신. 우리집 여자들중 제일 화려한 스펙이다. 동네 소문난 수재였는데도 그 시절 여자의 일생이 그러하듯 결혼과 함께 모든 꿈은 꺾였다. 딸만 줄줄이 셋 씩이나 낳아 할머니 구박을 견뎌가면서 살았다. 아빠는 다정한 분이었지만 잔소리도 심했다. 딸들은 잘들 자랐지만 결혼하니 살기 바빴다. 그런데도 엄마는 늘 씩씩했고 잘 웃었다. 곱게 늙는 이의 대명사 같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도 늘 분주히 참 열심히 사셨다. 그림과 필라테스를 배우러 다니고, 친구들과 놀러도 자주 다녔다. 지금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 엄마의 얼굴은 누가 봐도 곱고 선했다.

엄마는 늘 긍정적이었다. 사고를 쳐도 좋은 쪽으로 생각했다. 내가 빡빡 우겨서 예술대학갈 때도, 더 빡빡 우겨서 일찍 결혼할 때도 펄펄 뛰는 아빠에 맞서 내편을 들었다. 모범생 큰딸였지만 까탈+까칠+꼴통 쓰리콤보였던 나를 막을 사람도 없었다. 엄마의 무조건 지지 덕분에 대학때 참 잘도 놀았다. 노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냥 그 시절 할 수 있는 가장 재밌는 걸 한거였다. 늘 그래왔다. 살면서 어느 시절이건 그 때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일들을 성실히 했다. 20대 유흥과 연애, 30대 육아와 전쟁, 40대 관계와 통찰. 그 모든 게 공부였고 놀이였고 일이었다. 무엇이든 해보고 겪어봐야 아는 나는 기꺼이 경험하기를 즐겼고 과정을 긍정했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모든 게 엄마의 미소 덕분이었다. 언제까지고 지켜보아주는 은근하고 뜨거운 지지 덕분이었다.

문득 깨달았다. 이제는 내가 그리 해야 한다. 엄마에게 내가 더 뜨겁게 힘이 되어야 한다. 빙그레 웃는 어느 나한의 미소 앞에서 따라 웃다가 왠지 눈물이 났다. 웃음과 긍정을 가르쳐 준 엄마의 그 미소가 겹쳐진 까닭이다. 나한, 내 안에 존재하는 깨달은 자 혹은 깨달은 삶을 살 수 있는 능력, 곧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한다. 평범하게 살아가며 하나씩 하나씩 생의 소중함을 배워가는 존재, 나이 팔십이 되어서야 겨우 늙음을 깨닫는 존재, 나이 오십이 되어도 꿈꾸느라 철안드는 존재, 일과에 지쳐 병원에 온 노인네에게 서운하게 툭 대하고 집에 가서 힘없는 자기 엄마를 보며 후회하고 가슴 따끔거릴 존재. 그 존재들은 결국 사라지고 여기 돌사람만 남았다. 역사는 지나가고 순간만 남았다. 나한상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계속 끄덕거렸다. 현재, 긍정, 온기, 순리.. 먼저 깨달은 그들이 돌입술을 달싹거리며 건네는 말들을 들었다. 불현듯 가슴이 뜨거워졌다.

[임지영 나라갤러리 대표/ <봄말고 그림>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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