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재판을 방청한 한 형법 교수의 말이다.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많은 형사소송 관련 법들이 언급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실제 사법농단 재판에서 피고인들은 그동안 신속한 절차진행을 명목으로 무시돼 왔던 형사소송 절차 하나하나에 딴지를 걸고 있다.
지난 5월 2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첫 공판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측 변호인은 “검사의 모두진술은 공소장을 낭독하거나 요지를 진술하는 것까지이고, 입증계획이나 증거표시는 피고인의 모두진술이 끝난 이후에 해야 한다”고 했다. 형사소송법 제285조 규정을 들어 딴지를 건 것이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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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진행에 하나하나 이의 제기
모두진술이란 검사는 피고인을 법정에 세운 이유(기소이유)를 낭독하고, 피고인은 공소사실 인정 여부를 밝히는 절차를 말한다. 검사가 모두진술을 하고 나면 피고인이 이어받아 모두진술을 하고, 그 다음에 검사가 입증계획 등을 밝히는 것이 법이 정한 절차다. 그러나 통상의 형사재판에서 이 같은 절차가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다. 검사가 모두진술을 하고, 입증계획 및 제출증거 등을 한꺼번에 제시하고 나면 피고인 측 변호인이 이어받아 절차진행을 하는 식의 관행이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신속한 절차진행을 위한 방식인 셈이다.
재판장은 “보통 이의제기를 하지 않아 허가하는 사안인데…”라며 난색을 표했지만 변호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검찰 역시 모두진술 후 “형사소송법에 따라 변호인이 아닌 피고인부터 모두진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통상 변호인이 피고인을 대신해 모두진술을 해온 관행에 제동을 건 것이다. 이 역시 형사소송법 제286조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보통 형사재판에서는 양측 모두 이의제기 없이 넘어갔을 절차진행에 검찰과 피고인이 하나하나 따지며 대립한 것이다. 유·무죄의 입증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지난 6월 18일 제6차 공판기일에서는 형사소송규칙까지 등장했다. 이날 재판장은 서류증거 조사가 예상보다 더 길어질 것으로 보이자 검찰과 피고인 양측에 이렇게 말했다.
“증거 조사가 마쳐지지 않은 상태인데 다음 기일에 정다주 증인신문이 예정돼 있습니다. 증인의 출석 여부는 아직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만 지금 상황으로라면 형사소송규칙 제82조 2항에 따라 절차진행을 할 수 없는데…(중략)…열람기회 대신 (증거)목록만 교부하기로 약속한 상태고요.”
형사재판에 출석한 증인은 자신이 수사기관에서 작성한 참고인 진술조서를 비롯해 증거 조사를 거친 서류 등을 보면서 진술을 할 수 있다. 그 근거는 형사소송규칙 제82조에 명시돼 있다.
그러나 형사재판에서 이 조문이 언급될 일은 거의 없다. 공판진행 중 검찰이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 제출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증인신문 기일이 증거 조사와 겹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피고인 측에서 검찰이 제출한 증거물 전체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사법농단 재판은 그러나 첫 재판에서 검찰과 피고인의 모두진술 이후 사실상 진행이 멈춘 상태다. 변호인이 당초 쟁점이 되는 일부 문건에 대한 증거 조사만 이뤄지면 나머지 증거에 대해서는 동의하겠다는 의사를 번복, 재판부의 결정에 따라 전체 문건에 대한 검증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변호인들은 검찰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이동식 저장장치(USB)에서 확보한 법원행정처 문건의 한글파일과 검찰이 이를 출력해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한 자료가 동일한지를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검찰이 출력과정에서 자료 내용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첫 공판 이후 주 2회씩 이뤄지는 공판기일에 검찰이 임 전 차장 USB에서 확보한 법원행정처 문건 한글파일과 검찰이 증거로 제출한 출력물 자료가 일치하는지 여부를 일일이 대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문건 한 장 한 장을 모두 검토하는 것이다. 임 전 차장의 USB에 담긴 파일은 1142개에 달한다.
원본과 출력물 글씨 서체까지 비교
물론 이는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증거 조사 절차에 해당한다. 또 디지털 저장매체의 증거능력 인정에 대한 대법원의 확고한 원칙이기도 하다. 대법원 형사2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지난해 2월 압수물인 디지털 저장매체로부터 출력한 문건을 증거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원본과 출력물이 동일해야 하고(동일성), 출력과정에서 내용이나 그 형태가 바뀌지 않아야 한다(무결성)는 원칙을 다시 확인하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당시 형사2부에는 조재연, 고영한, 권순일 대법관이 속해 있었다.
심지어 출력물과 원본 사이의 제목 글씨체 차이를 놓고 비교하는 절차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지난 6월 18일 재판에서 빔스크린 화면에 ‘원세훈 사건 1심 판결 분석 및 항소심의 쟁점 정리’라는 제목의 출력물이 뜨자 재판장은 “파일 원본의 제목 폰트는 ‘HY헤드라인M체’인데 1005번 출력물 제목은 다른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검찰은 “출력 당시 (검찰 소유) PC의 폰트 자체 문제로 그렇게 된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제목을 제외한 나머니 텍스트는 모두 폰트가 동일한 것으로 확인했다. 모든 대화는 속기록에 남았다. 재판부는 제목의 폰트 비교뿐만 아니라 출력물과 원본 사이의 문건 페이지 총수 비교, 출력물에 남은 연필자국 유무, 형광펜 색칠 유무 등까지 모두 하나하나 비교했다.
이를 지켜본 한 법조인은 “피고인이 모든 증거물에 대해 부동의하고, 임종헌 전 차장 USB뿐만 아니라 서면 하나하나를 검토하겠다고 나서면 이 재판은 서류증거 조사에만 6개월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법조인은 “재판 지연전략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임 전 차장과 관련해 검찰이 제출한 기록만 20만 페이지이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관련해 제출된 기록만 16만 페이지다”라며 “일반인들은 기록이 10만쪽, 20만쪽이라고 하면 감을 잡지 못할 수 있는데 20만쪽이면 하루종일 쉬지 않고 매일 500페이지짜리 책 2권을 집중해서 읽었을 때 200권을 읽어야 하는 양”이라고 설명했다.
‘인 두비오 프로 레오(In Dubio Pro Reo).’ ‘의심스러운 것은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는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이다. 쉽게 말해 재판부가 유죄판결을 내리기 위한 입증 책임은 기소한 검사에게 있고, 유죄로 판단할 명백한 증명이 없으면 피고인은 무죄판결이 내려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대원칙이 사법농단 재판에서만 철저히 지켜지고 있다는 데서 ‘불평등’의 문제가 불거진다. 일반 피고인들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할 형사소송법 및 형사소송규칙 각종 절차를 사법농단 피고인들은 기존 관행을 하나하나 반박하며 밟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 두비오 프로 레오’ 원칙은 법정에 서는 모든 피고인에게 적용돼야 한다.
“뭐 필요하다고 피고인이 주장하면 하겠죠. 검증도 하자고 하면 해야죠.” ‘검찰이 제출한 출력물과 원본 파일 간의 제목 폰트까지 비교해서 동일성을 검증해본 경험이 있습니까?(기자)’ “한 적은 없는데….”
20년 이상 재판을 해온 전·현직 판사 7명에게 ‘검찰이 제출한 출력물과 압수물 원본 파일 간의 동일성 검증을 사법농단 재판부가 하고 있는 수준까지 해본 적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공통적으로 돌아온 답은 “없다”였다.
30년 이상 재판업무를 해온 전직 고위법관은 “피고인이 원한다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동일성·무결성을 따지는 게 형사소송법의 원칙이고 그걸 비판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실제 이런 식으로 검증을 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대해 피고인 측이 증거동의를 한 이상 재판부가 나서서 하자고 할 수도 없는 일 아니냐”고 했다. 30년 동안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피고인의 방어권은 당연히 보장돼야 한다. 과거에는 대법원장이었더라도 지금은 한 명의 피고인이고, 피고인에 대해서는 법이 인정하는 모든 방어권 행사가 인정돼야 한다. 그러나 유독 사법농단 관련자들에게만 재판부가 관대하다는 인상을 준다면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로 봐야 한다.
“재판장이 유죄의 심증을 갖고 피고인을 대하는 느낌이 든다고 재판부 기피신청을 하는 변호사들이 많을 것 같나. 거의 없다. 재판장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 없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대해 부동의 의사를 표했더니 재판장이 이마를 짚고 한숨을 쉰 적도 있다. 그런 경험들이 쌓여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대해 대부분 인정하고 넘어가는 관행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사법농단은 엄격하게 증거 조사를 하고, 피고인이 검사를 향해 훈계를 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다. 사법농단 이후 법정문화가 바뀔까. 아니라고 본다. 대법원장이나 되니까 가능한 일이다.”(중견 변호사)
일반 피고인은 감히 엄두도 못내
검찰을 향해 ‘잘못된 기소’ ‘소설을 썼다’는 등의 발언을 할 수 있는 것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특권일 뿐 일반 피고인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앞서 첫 공판에서 검찰의 공소사실에 대해 “모든 것은 근거가 없고, 어떤 것은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무려 80명이 넘는 검사를 동원해 8개월이 넘는 수사를 한 끝에 300페이지가 넘는 공소장을 (검찰이) 창작을 했다. 법관생활을 42년간 했지만 이런 공소장은 처음 봤다. 모든 것을 왜곡하고, 견강부회하고,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줄거리를 만들어내다가 마지막 결론에서는 재판거래는 온데간데없고, 겨우 심의관들에게 몇 가지 문건과 보고서를 작성한 게 직권남용이라고 끝을 낸다. 용두사미도 이런 용두사미가 없다. 뱀도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중략)…이것이 과연 수사인지, 이런 것을 두고 사찰이라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삼권분립을 기초로 하는 나라에서 법원에 대해서 이토록 잔인한 수사를 한 사례가 대한민국밖에 어디 더 있는지 묻고 싶다. 법원에 대해서도 이런 수사를 할 지경이라면 어느 국민 누구한테 이런 수사를 못하겠나.”
경찰 출신 한 변호사의 말이다. “만약 내 의뢰인이 법정에서 저런 말을 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봤다. 검찰은 분명히 기소한 혐의 외에 여죄 수사를 벌일 것이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은 없거든. 형사재판은 어차피 검찰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사법농단 재판에 대해 평가를 내릴 생각은 없지만 검사에게 호통치는 피고인을 또 언제 다시 볼 수 있겠나.”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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