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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감정 싸움이 전쟁으로···국토 초토화 된 두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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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온두라스 '축구전쟁'

월드컵 예선 치르다 전쟁 시작해

'관중 충돌' 묵은 감정 폭발시켜

전쟁은 작은 구실로 시작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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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북중미축구연맹 주최 골드컵 대회에서 온두라스 공격수와 엘살바도르 골키퍼가 충돌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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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접한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19세기 초반에 존재했던 ‘중앙아메리카 연방공화국’ 시절처럼 한 지붕 아래서 살던 때도 있었지만, 사이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이들의 불편한 관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년 전인 1969년 7월 14일 발발했던 '100시간 전쟁'이다. 하지만 그보다 축구가 전쟁의 기폭제가 되었기에 '축구 전쟁(Guerra del Fútbol)'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많이 알려졌다.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제9회 FIFA 월드컵 대회 중미 예선 최종전에서 맞섰다. 정열적으로 축구를 좋아하는 나라들답게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치러진 경기는 처음부터 신경전이 대단했다. 1969년 6월 8일, 열린 첫 경기에서 홈팀 온두라스가 1-0으로 승리했으나 일주일 뒤에 장소를 옮겨 벌인 2차전에서는 엘살바도르가 3-0으로 승리했다. 당시에는 원정 다득점 같은 기준이 없어 3차전을 벌여 승패를 가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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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두라스를 기습 침공한 후 점령지를 순찰하는 엘살바도르 기병대 [사진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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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난 두 차례의 경기는 양측 응원단 사이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TV중계단도 비속어를 남발하며 대놓고 상대를 헐뜯었을 정도로 과열되었다. 특히 2차전 후 흥분한 엘살바도르 인들이 온두라스 응원단을 집단 폭행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온두라스에 거주 중인 엘살바도르 인들에 대한 무차별적 테러 행위가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승부를 봐야 했기에 FIFA는 제3국에서 최종전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6월 27일, 멕시코시티에서 벌어진 최종전은 관중보다 경찰이 더 많았고 경기도 마치 집단 격투기처럼 거칠게 진행되었다. 연장까지 가는 혈전 끝에 3-2로 엘살바도르가 승리하면서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이런 결과에 격노한 온두라스가 6월 29일 국교 단절을 선언하자 엘살바도르는 온두라스에 거주하는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7월 14일 전격적으로 침공을 단행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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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제3차전의 모습. 10만 명을 수용하는 경기장에 2만 명만 입장하도록 제한했고 그보다 많은 경찰들이 이들을 감시했다. [사진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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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스포츠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축구는 내셔널리즘이 노골적으로 표출되는 종목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2002년 월드컵 4강 달성 후 임시공휴일까지 지정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상대가 적성국이더라도 단지 축구 때문에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사실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전쟁도 축구는 단지 도화선이었을 뿐이고 이미 두 나라는 내재적으로 쌓인 것이 많았던 상태였다.

양국은 반복된 정변과 독재로 말미암아 사회 혼란이 반복되고 여기에 더해 극소수의 대지주들이 경제를 지배하면서 현재도 빈부 격차가 극심한 농업국들이다. 국민의 불만이 커지자 위정자들은 상대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용인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자 했다. 처음에는 영토 문제로 대립했지만, 점차 상대 국민을 직접 자극하는 행위도 벌였다. 특히 온두라스에 거주하는 엘살바도르 인들이 공격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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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후 참전 군인을 치하하는 온두라스 정부의 기념식 [사진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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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는 경제권을 장착한 소수의 거대 지주들 때문에 농민이 경작할 농지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에 19세기 말부터 약 50만 명의 엘살바도르 인들이 인구는 비슷하지만, 국토가 8배가 커서 농지 확보가 수월한 온두라스로 이주했다. 그렇게 건너간 많은 이들이 경제적으로 성공하지만, 기존 온두라스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배타적인 것으로 행동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선민의식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내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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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전쟁 당시 엘살바도르인들에 대한 온두라스의 전단 [사진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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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1969년 초, 온두라스 정부가 농지 개혁을 빌미로 눈엣가시 같던 엘살바도르인 수만 명을 추방하자 가뜩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엘살바도르는 부담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정치, 경제, 문화적 갈등이 겹겹이 쌓이면서 두 나라의 감정은 극도로 악화하였다. 결국 축구는 전쟁도 불사할 생각을 가지고 있을 만큼 서로를 미워하던 이들에게 불을 댕겨준 성냥이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발발한 전쟁에서 기습의 효과를 본 엘살바도르가 유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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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사라예보 사건 당시 검거되는 프린시프. 이 암살 사건은 1000만 명이 죽어간 제1차 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진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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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미주기구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5일 만에 총성이 멈추었고 8월 초 엘살바도르 군이 철수하는 것으로 일단 휴전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침략자로 낙인찍힌 엘살바도르는 주변국들과 무역이 끊기면서 경제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고 온두라스는 국토의 일부가 초토화되며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이 공식적으로 전쟁을 끝낸 것은 11년 후인 1980년에 평화 조약이 체결하면서였고 2006년에서야 국경선 문제도 해결되었다.

아무리 상대를 증오해도 반드시 사상과 피해를 동반하므로 전쟁은 쉽게 벌일 수 있는 행위가 아니다.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이나 1969년의 축구 경기처럼 그 자체만으로는 명분으로 삼기 어려운 사건들을 빌미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구실을 찾고자 하는 이에게는 작은 빌미도 개전의 이유로 삼기에는 충분한 명분이 되었다. 문제는 이런 모습이 단지 과거의 일이었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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