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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30 (일)

일본 무역분쟁 파장과 해법-반도체는 서막…기계·탄소섬유 ‘빨간불’ 수입선 다변화, 부품·소재 국산화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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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발 무역분쟁에 대한 우려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당장 수출 우대 품목에서 제외된 반도체 핵심 부품 규제 여파와 추가 수출규제가 예고되는 품목, 그리고 한일 무역분쟁이 장기화될 가능성이다. 각 단계별로 우리 경제에 미치는 파장과 대응 방향을 살펴봤다.

매경이코노미

▶반도체 핵심 부품 수출규제

▷“가장 아픈 부분” 비메모리 반도체 타격

일본이 먼저 수출규제를 적용한 품목은 포토레지스트(감광제)와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세 가지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이 “제재당할 수 있는 품목에 대한 리스트를 준비해두고 있었는데 가장 아프다고 느낄 1, 2, 3번 품목을 일본이 규제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다. 반도체 완제품 재고분을 수개월 치 갖고 있어 당장은 큰 문제가 없지만 재고가 동나는 4분기부터는 피해가 본격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물론 생산에 차질을 빚을 만큼 최악의 상황으로 가기에는 일본도 부담스러운 입장이다. 한국산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주 고객사 중에는 구글, 애플 등 미국 기업들도 많기 때문이다. 실제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쓰이는 일본산 포토레지스트는 수출규제 논란이 시작된 이후에도 여전히 정상 수입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파이낸셜타임즈(FT)는 일본의 한 고위 관료 발언을 인용해 “일본이 군사용이 아닌 민수용 반도체 소재는 계속 수출할 것”이라며 “이에 따라 한국의 반도체 제조업체들이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럼에도 불안은 남는다. 일단 메모리 반도체용 부품은 수입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했지만 비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부품(EUV용 포토레지스트)은 아직 수출 재개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삼성전자가 차세대 시스템 반도체 생산 공정에 사용하고 있는 품목이다. 일본이 수출 불허 결정을 내리면 비메모리 반도체 생산 타격이 불가피하다. 또 일본 정부는 최근 3개 규제 품목 중 하나에 대한 일본 기업의 수출 신청서를 ‘서류 미비’ 이유로 반려, 첫 수출규제 사례가 발생했다. 일본 기업은 서류를 보완해 다시 수출을 신청할 예정이지만 일본 정부가 또다시 다른 핑계를 대며 반려할 가능성도 상존해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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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발 무역분쟁으로 반도체 핵심 부품이 수출 우대 품목에서 제외되면서 국내 기업 반도체 생산 타격이 불가피하다. 사진은 SK하이닉스 청주 M15 반도체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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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수출규제 확대 카드 만지작

▷전략 물자 1112개 규제 우려

반도체 핵심 부품 3종 수출규제는 서막에 불과하다. 일본은 향후 한국의 대응에 따라 추가 수출규제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일본 정부는 지난 6월 19일 한일청구권협정 분쟁해결 절차 중 하나로 제3국이 참여하는 중재위원회를 설치하자며 7월 18일까지 한국 정부의 답변을 요구했다. 일본이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로 수출규제에 나선 만큼, 이에 대한 답변이 성에 안 찰 경우 추가 수출규제 조치를 내놓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업계 관측이다.

전략물자관리원이 게시한 일본 경제산업성의 ‘일본 수출 통제 목록’에 따르면 민간용 전략물자 261개, 비민간용 전략물자 851개 등 총 1112개가 일본의 전략물자로 분류돼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일본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전략물자’를 빌미로 수출규제에 나설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반도체, 디스플레이에 이어 2차 수출규제가 적용될 것으로 예상되는 분야는 공작기계와 탄소섬유 등 화학제품이다. NHK는 “한국 정부가 개선의 움직임이 없으면 규제 강화의 대상 일부를 공작기계나 탄소섬유 등 다른 수출 품목으로도 넓히지 않을 수 없다고 보고 한국 쪽의 대응을 신중히 지켜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밖에도 일본 의존도가 높은 산업군이라면 언제든지 수출규제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 1~5월 누적 기준 일본에서 수입한 반도체 제조장비는 총 12억1200만달러 규모로 전체 수입액의 33.8%에 달했다. 같은 기간 화학 원료인 자일렌(수입액 4억5700만달러)은 일본 의존도가 95.2%, 고철(7억500만달러) 62.3%, 고장력 강판(4억6300만달러) 56.1%, 플라스틱 제품(6억3400만달러)은 40.5%에 달한다. 또 자동차 등에 쓰이는 신소재인 탄소섬유와 각종 부품 역시 ‘군용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가 수출통제 물자에 포함시켰다.

금속 공작기계 설비 부문은 일본 제품에 대한 의존도가 40% 안팎에 달한다. 대기업보다는 중견·중소 제조업체 의존도가 높아 대응도 더욱 어려울 전망이다. 추가 설비 도입이 늦어져 사업 확장에 제때 나서지 못하는 것도 우려되지만, 기존 설비의 수리 부품을 못 구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보통은 장비가 고장 나서 공정이 멈추면 큰일이므로 주기적으로 교체하는데 긴급대응용으로 구비해두는 수리 부품은 한 달 정도 쓸 만한 분량에 그친다. 만일 무역분쟁이 그 이상 길어지면 수리 부품을 못 구해 최악의 경우 설비 가동이 중단될 수 있다. 장비를 분해해 부품을 직접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이는 특허 침해 소지가 있어 어렵다”고 토로했다.

반도체 소재·부품에 대한 추가 규제 가능성도 거론된다. 집적회로(IC), 전력반도체(PMIC), 리소그래피 장비, 이온주입기, 웨이퍼, 블랭크 마스크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일본 수출규제의 주요 근거로 작용하고 있는 ‘수출무역관리령’ 통제대상 품목(1∼15항)에 포함된 제품들이다.

박유악 키움증권 애널리스트는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웨이퍼와 블랭크 마스크는 메모리 반도체와 비메모리 반도체 전반에 걸쳐 사용되는 필수 소재로, 일본 기업들이 전 세계 시장점유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국산화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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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반도체 엔지니어가 반도체가 생산되는 클린룸에서 생산설비를 점검하는 모습. <삼성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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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분쟁 장기화 가능성도

▷수소차 연료전지·배터리 분리막 등 불안

한일 무역분쟁은 미중 무역분쟁의 축소판에 가깝다. 겉으로는 정치·경제·외교적인 분쟁으로 보이지만, 그 기저에는 후발 국가의 성장으로 인해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던진 견제구라는 해석이 힘을 얻는다. 역내 패권 다툼이 전쟁으로 비화되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다.

일본이 이번 무역분쟁을 정부 차원에서 치밀하게 준비해온 것도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NHK에 따르면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4월 일본의 첨단기술과 원재료 관련 무역관리를 조사하는 전문부서를 신설, 조직적인 대응에 나섰다. 일본이 오는 8월 한국을 ‘백색국가(우방국에 대한 수출 절차를 간소화하는 우대 혜택)’ 명단에서 제외해 전략물자의 수출규제를 강화하면 한국 경제는 광범위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반도체·디스플레이·공작기계·화학제품은 물론, 수소차·AI(인공지능)·로봇·배터리·생명공학 등 미래 신성장 산업 육성도 차질이 불가피하다. 수소차에 필요한 연료전지, 2차 전지 배터리에 들어가는 분리막 등도 상당 부분 일본산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이 수입한 품목 중 일본 의존도가 50%가 넘는 것은 24개에 달했다.

세계 최대 순채권국인 일본이 금융산업을 규제, 한국의 돈줄을 막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일본계 금융기관이 한국 민간기업과 공기업 등에 제공한 전체 여신 규모는 지난해 9월 기준 586억달러(약 69조1773억원)에 달한다. 일본 현지에서 영업 중인 금융기관뿐 아니라 홍콩, 뉴욕 등 해외에 진출한 일본 금융기관으로부터 조달한 자금을 포함한다. 일본 경제 전문가인 이지평 LG경제연구소 상근자문위원은 “한일 간 외교 현안을 해결하지 못할 경우 일본 정부의 한국에 대한 보복 조치는 무역 이외에 금융, 기술과 과학 교류, 비자, 젊은 층의 일본 취업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될 위험성이 있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순채권국이며 그 영향력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일 무역분쟁 해법은

▷국산화율 높이고 민관 공동연구 나서야

한일 무역분쟁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로 우리 경제의 성장동력이 더 저하되기 전에 정부가 장단기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단기적으로는 WTO 제소 등 외교 채널을 총동원해 일본이 수출규제를 풀도록 압박하고 수입선을 다변화하며, 중장기적으로는 부품·소재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업 차원에서는 수입선을 다변화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단기 대책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지난 7월 10일 청와대 긴급간담회에 참석한 국내 주요 기업 총수들이 화학 분야에 강점이 있는 러시아, 독일과의 협력 확대를 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단기간 내 국내 부품·소재 원천기술 확보를 위해 전략부품 산업의 인수합병(M&A)이 적극적으로 검토될 필요성도 제시됐다.

중장기적으로는 부품·소재의 일본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절실해졌다. 첫걸음은 국산화 촉진을 위한 환경 조성이다. 가령 핵심 부품·소재 연구개발(R&D) 예비타당성 조사를 면제 내지 간소화해 개발 속도를 높이고 기업의 산업 진출을 막는 환경규제를 개혁하는 식이다.

일례로 정부가 2021~2026년 6년 동안 국내 소재·부품 생태계 자립도를 높일 핵심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소재산업혁신기술개발사업’을 추진 중이지만 반도체 기판을 제작할 때 쓰는 감광제인 ‘포토레지스트’ 국산화 사업은 예비타당성 평가의 첫 단계인 기술성 평가도 통과하지 못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포토레지스트 국산화 R&D 사업의 경우 추진 여부 확정, 예산 편성 과정을 거쳐 오는 2021년에야 시작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칭가스의 국산화를 위해서는 환경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는 최근 ‘일본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대응 방안 검토’ 보고서에서 불화수소가 한국에서 제조되기 어려운 요인으로 ‘환경규제’를 언급하면서 “2012년 구미 불산 누출 사고 이후 정부가 화학물질관리법 등 관련 규제를 강화한 탓에 국내 업체가 불화수소 생산 공장을 설립하기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강화된 규제는 기존 유해화학물질관리법과 비교해 취급시설 기준이 79개에서 413개로 5배 이상 늘었다.

물론 국산화율을 높인다 하더라도 어려움은 있다. 산업 특성상 같은 사양의 제품이라도 거래 기업을 변경하면 미세한 차이만으로도 공정이 불가능하거나 불량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대체물질이나 대체 공급자로 100% 전환하기가 사실상 어렵다는 얘기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연구원은 “필요한 소재를 서둘러 개발해 국산화율을 높이는 방식보다는 대기업 신제품 개발에 일본 제품을 배제하고 국내 중소기업의 신소재·신장비를 사용한다면 더 의미 있는 국산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나아가 민관이 합동으로 테스트베드를 구축해 중소·벤처기업들이 만든 반도체 소재와 부품, 장비 등을 마음껏 시험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는다. 미국 IBM과 뉴욕 주정부가 손잡고 반도체 장비·소재를 연구하는 알바니 컨소시엄을 만들었듯 한국도 전략적으로 초기 기술을 확보할 연구소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노화욱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장은 “국내 대기업이 일본의 검증된 소재·부품만 쓰려고 하는 관행을 바꿔야 한다. 정부와 대기업이 테스트베드를 구축해 중소·벤처기업과 부품·소재·장비를 공동으로 개발해야 실효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노승욱 기자 inyeon@mk.co.kr, 정다운 기자 jeongdw@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17호 (2019.07.17~2019.07.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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