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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 (목)

일본의 역습 ‘기술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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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 피해가 발생하면 필요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

“한국 수출규제는 협의 대상이 아니고 철회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

한일 경제 갈등이 벼랑 끝으로 치닫고 있다. 일본 정부의 소재, 부품 수출규제로 당장 한국 핵심 산업인 반도체, 디스플레이가 치명타를 입게 됐다. 일본이 수출규제 품목을 계속 늘릴 경우 수소차, 배터리, 로봇 등 미래 산업 발목까지 잡을 것이란 우려가 크다. 이번 수출규제가 ‘빙산의 일각’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일본이 치밀한 경제보복에 나선 배경은 뭘까. 일본 경제보복에 맞서 한국 핵심 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높일 방법은 없을까. 한일 무역전쟁의 실상과 해법을 진단해본다.

매경이코노미

日 수출규제 이어 ‘화이트국가’ 제외할 듯

정부 우왕좌왕, 韓 기업 경쟁력 벼랑 끝에


한국과 일본 간 무역갈등이 격화되면서 파장이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일본은 반도체 등 주요 산업 필수 소재 3가지에 이어 다른 품목 수출까지 규제하겠다고 밝혔고 한국은 ‘강력 대응’ 방침을 내비쳤다. 기업들이 저마다 대응책 마련에 부심한 가운데 한일 갈등이 심화되면 오히려 중국이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일본 정부는 지난 7월 4일부터 한국의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 스마트폰, TV 제조에 쓰이는 필수 소재 수출규제에 나섰다. TV와 스마트폰 액정에 쓰이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반도체 부품인 포토레지스트(감광액)와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등 3가지 품목을 ‘포괄적 수출 허가’ 대상에서 제외하고 ‘개별 수출 허가’ 대상으로 바꿨다. 허가받는 데만 90일가량이 걸려 수개월간 D램 반도체,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패널 공급에 차질을 빚을 우려가 크다. 이 중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포토레지스트의 대일 수입 의존도는 각각 93.7%, 91.9%에 달할 정도로 절대적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시키는 방안까지 검토 중이다.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이 제외되면 수출 통제 물자 이외 품목도 개별 수출 허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식료품, 목재 등을 제외한 대부분 품목이 해당되는 만큼 국내 주력 산업이 전방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전기차 배터리, 자율주행차 등 한국 미래 성장산업 소재, 부품 상당수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한일 무역 실상을 점검하고 첨단기술 무역 전담부서까지 신설해 수개월 전부터 한국 수출규제를 준비해왔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이뤄진 지 50년이 넘도록 한국은 단 한 차례도 대일본 무역수지 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국무역협회와 관세청에 따르면 1965년부터 지난해까지 54년간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 누적액은 총 6046억달러(약 708조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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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교역에서 흑자를 내지 못한 것은 한국 주요 산업 기술력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등 핵심 산업 몸집은 커졌지만 정작 소재, 부품 기술은 대부분 일본에 의존해온 실정이다. 소재, 부품 교역에서 발생한 적자만 놓고 보면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최근 5년간 90조원에 이를 정도다. 일례로 지난해 반도체 제조용 장비에서만 일본에 57억6000만달러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일본산 소재, 부품 없이는 한국 주력 산업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최근 반도체, 무선통신장비, 소재·부품 등 중소 제조업체 269개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 기업의 59%는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가 지속될 경우 6개월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답했다.

정부도 제 역할을 못했다.

재계 안팎에서 ‘반도체 소재 국산화가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정부는 오히려 규제를 강화하는 데 급급해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지적이다.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학계를 중심으로 반도체 소재 국산화 필요성이 여러 차례 제기됐지만 이번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 큰 진전이 없었다. 한국은 세계 최고 반도체 회사를 보유했지만 반도체 가공 공정에 들어가는 소재, 장비를 개발할 수 있는 (민관) 공동연구소가 없는 상황이다. 전략적으로 초기 기술을 확보할 연구소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랴부랴 정부는 올해 추가경정예산에 핵심 부품 국산화 사업을 추가할 계획이지만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라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소재, 부품 연구개발(R&D)의 경우 길게는 10년 이상 긴 기간이 소요되는 데다 우수한 기술력이 필요해 당장 예산을 늘린다고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다.

“일본은 치밀하게 정부부처 간 공동 작업까지 해가며 선택한 작전으로 보복을 해오는데 우리는 서로 비난하기 바쁘다. 미중 보호무역주의로 제조업 제품 수출이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우리는 여유도 없으면서 하나씩 터질 때마다 대책을 세운다. 이제 제발 정치가 경제를 좀 놔줘야 할 때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한편에서는 한일 무역갈등이 지속되면서 중국이 이번 갈등의 최대 수혜자가 될 것이라는 분석까지 나왔다.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오사나이 아쓰이 와세다대 교수의 말을 빌려 “한일 갈등의 유일한 승자는 중국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메모리 반도체, 디스플레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술력을 보유한 한국이 일본의 필수 소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사이 중국이 빠르게 추격해올 것이라는 의미다.

중국은 반도체, 로봇, 전기차 등 10개 하이테크 제조업 분야를 2025년까지 세계 1위로 키우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내놨다. 중국 국영 반도체 기업인 칭화유니그룹은 최근 D램 사업군 회장에 댜오스징 전 중국 공업정보화부 정보처장을 임명하며 D램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 세계 시장 70%를 점유해온 시장에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겠다는 포부다. 아직까지는 한국 반도체 업계와 기술 격차가 크지만 거대한 내수 시장과 중국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대대적인 설비·R&D 투자에 나설 경우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디스플레이 시장에서도 중국은 차세대 디스플레이 OLED 분야에 집중 투자하며 한국 업체를 바짝 추격하는 중이다. 시장조사업체 IHS는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2020년 전 세계 중소형 OLED 생산 가능량의 절반 이상인 53%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중국 기술력을 우습게 본 우리로서는 긴장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일본이 무역보복 수위를 높이고 중국이 자국 산업을 키우는 사이 한국만 우왕좌왕하며 주요 산업 경쟁력을 잃을 위험이 크다”는 우려다.

[특별취재팀 = 김경민(팀장)·노승욱·정다운 기자·박영선 인턴기자 / 그래픽 : 신기철]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17호 (2019.07.17~2019.07.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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