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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2019 이효석문학상 최종심 진출작 ① 김종광 `보일러`] 소외된 처소의 블랙 코미디, 그곳에 `사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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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회 이효석 문학상 ◆

매일경제

인간은 모두 고유한 자리를 갖는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자리에 인간이 있고, 인간과 장소가 만나며 이야기를 이룬다. 소외된 자리에 놓인 인간의 풍부한 표정을 바라보며 서사의 힘을 추구하는 소설가가 있다. 소설가 김종광(48·사진)이다. 맨땅을 일궈 혹자를 배불리 먹여온, 언제나 험지에서 세계와 겨루거나 또 뒹굴어야 했던 농민(農民)의 처소 '곁'을 김종광 작가는 해학적 글쓰기로 지켜 왔다.

보일러 하나 장만했다가 '애물단지로 굴리며 속 끓이는' 한 노인의 이야기. 그게 서사의 전부인데, 그게 참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맞은 뺨 또 때리더니, 새똥까지 떨어지고, 아예 헛발질에 미끄러지는 서사라는 은유까지 가능할지 모르겠다. 차악(次惡)이 불가능한 최악이 인생이란 의미였을까. 현실의 소외, 불가능한 소통, 불순한 노동구조, 현대의 불안이 주제로 오른다. 줄거리부터 살핀다.

한국전력 직원 이나미, 스카이보일러 영업과장 홍진희가 노인 '김사또' 자택을 대뜸 방문한다. 보일러 바꾸란다. "700만원이면 헐값이죠. 원래는 950만원이에요. 한 달에 30만원 번다고요." 듬직했던 보일러는 3년 만에 '시베리아'를 연상시키는 '얼어죽을' 사지(死地)로 김사또를 밀어낸다. 구수한 사투리에 '클클' 웃다가 어처구니없는 사회구조가 떠올라 마냥 웃음 짓기가 어려워진다.

점입가경이다. '동네 기술자' 윤기술이 고친답시고 배관 하나를 자르는데, 훗날 보니 자동온도조절장치였고, 놀란 마음에 둘째 아들이 사온 전기난로는 '퍽' 소리를 내고 두꺼비집이 내려간다. 둘째에게 김사또가 으르딱딱거린다. "사십 넘은 애가 돈 귀한 것도 믈르고, 쓸 줄도 믈러." 참다 못한 아내는 김사또에게 핀잔을 준다. "저따위 보일러 산 사람도 있는데, 전기난로 가지고 시비래요."

설치회사 부르니 핑계가 가관이다. "우리가 안 놨다니까요." 설치회사도 본사 하도급이었건만, 하도급이 또 하도급을 준 수리업체는 나무 보일러실 핑계를 대더니 한술 더 뜬다. '할인가'를 들먹이며 40만원만 더 쓰란다. 뒷목 잡는 고혈압에 김사또의 혈관이 터지기 직전. 그제서야 본사 직원이 왔다. "처음부터 우리를 부르지 그러셨어요." 다 고치니, 겨울 다 갔다. 훈훈한 끝마무리는 다행스럽다.

인간이 설계했지만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노동구조를 에둘러 비판한다. 본사 직원은 처마에서 떨어진 고드름을 얻어맞고도 유니폼을 벗지 않는데, 내적 본질인 시스템보다도 외적 치장일 뿐인 유니폼에 집중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씁쓸한 현실과 가깝다. 밤마다 보일러에서 들리는 '대포소리'는 현대인의 심연을 두드리는 이 시대의 노크 소리와 같을 터. 그건 불안의 다른 징표일까. "저 대포소리는 한밤중에만 났어요. 자정 녘부터. 그전까지는 총소리 정도로만 났어요. 영감, 그렇죠?" 요양병원을 둘러싼 노년의 자리, 혈육 간에도 불가능한 소통이란 화두도 문장에 녹였다.

책장을 덮으며 요약하자면 '아버님 댁에 보일러 한 대 놔드리면 절대 안 되는' 소설이 된다. 인간에게 온기를 건네야 할 보일러가 거꾸로 냉혹한 현실로 인간을 밀어내는 역설이랄까. 방민호 평론가는 뜨겁게 호평했다. "현대의 농촌에 스며든 현실적 문제들을 날카롭게 드러냄과 동시에 이를 말의 '성찬'으로 펼쳐내는 '진경'을 이루었다." 구효서 소설가도 헌사를 남겼다. "시골 노인 얘기만 해왔다는 '올드함'이란 지적 이면에서, 김종광은 자기 문학만 계속 밀어붙여온 작가로서 소설가 이문구 선생을 떠올리게 만든다."

1971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난 김종광 작가는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8년 '문학동네' 여름호에 단편 '경찰서여, 안녕'을 발표하며 처음 등단했고,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해로가'가 이어 당선됐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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