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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설왕설래] 일본 경제보복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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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1885년 독일 철의 재상 비스마르크는 자국의 국립은행에 러시아 국채를 담보로 한 융자를 금지시켰다. 비슷한 시기에 독일 정부는 값싼 러시아 곡물의 유입을 막기 위해 세 번에 걸쳐 수입 농산물 관세도 인상했다. 러시아가 독일산 공업제품에 고율의 관세를 물린 데 대한 보복조치였다. 5년 뒤 양국은 동맹관계를 청산했고, 급기야 1차 세계대전의 지옥 속으로 빠져들었다.

2010년 9월 센카쿠열도 영토분쟁 당시 중국은 일본에 희토류 수출을 금지했다. 당시 희토류는 전자제품의 필수 소재로 일본의 대중 의존도가 90%에 달했다. 화들짝 놀란 일본은 일단 굴복하는 듯했다. 그러나 일본은 집요하게 중국 이외의 나라로 수입선을 다변화했고, 호주·인도 등에서 희토류 개발권을 따내기도 했다. 결국 희토류 가격은 갈수록 하락했고, 2년 뒤 일본이 수입하는 중국산 희토류 비중은 50% 아래로 떨어졌다. 희토류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일단락된 셈이다.

세계일보

이번에는 일본이 한국의 간판 산업인 반도체 공습에 나섰다. 일본은 이달 초부터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등 반도체 핵심소재 3종에 대해 수출 규제를 시작했다. ‘일본이 한국의 급소를 찔렀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갈수록 시장의 흐름은 딴판이다. SK하이닉스의 주가는 지난 20여일 동안 10% 이상 뛰었고 한때 급락했던 삼성전자도 일본의 보복조치 직전 수준을 회복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반도체 D램의 현물시장가격도 최근 2주 사이 23%나 뛰었다. 업계에서는 일본의 수출 규제가 지난해 말부터 반도체업계를 괴롭혀 온 공급과잉 문제를 해소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는 기대감마저 감돈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기사에서 일본의 수출제한 결정을 ‘자해행위’라고 진단했다. 일본 내부에서도 “일본 정부가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경제는 툭 하면 터지는 대내외 악재에 ‘위기’가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위기’라는 말에는 위험뿐 아니라 기회의 뜻도 담겨 있다. 세상사 새옹지마(塞翁之馬)는 경제에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주춘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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