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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지역에서] 타인의 노동 / 명인(命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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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명인(命人)
전남청소년노동인권센터 교육활동가


얼마 전 당근을 세 자루나 얻어왔다. 상품성이 떨어져 팔 수 없는 당근이라지만 뿌리가 여러 갈래이거나 크기가 작을 뿐 먹는 덴 아무 지장이 없는 당근들.

직접 간 당근주스를 아침마다 우아하게 마셔줄 생각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당근즙을 내기로 했다. 옆지기가 당근을 씻어주면 나는 썰어서 녹즙기에 갈았다. 못난이 당근이어서 손질에 시간이 더 걸렸다지만 두 사람이 두 시간 노동으로 얻은 당근즙 2리터. 옆지기가 투덜거렸다. “노동력 대비 당근즙이 이렇게 적게 나와서야 어디 당근 갈아 먹고 살겠나.” “그러게, 타인의 노동이 없이 마시는 당근즙, 전혀 우아하지가 않네.”

봄부터 죽어라고 농사지어 당근을 다 뽑아놓은 밭에서 우리는 줍기만 했을 뿐인데, 당근주스 한 잔을 마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을 거쳐야 하는지를 새삼 생각했다. 때에 따라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햇볕과 비를 기다렸을까. 힘들게 생산해서 상품성 있는 걸로만 선별하여 출하해도 유기농 당근 1㎏에 1450원이라니 기가 막힌다. 먹고 입고 쓰는 일을 내 손으로 할 때, 그제야 깊이 생각하게 되는 ‘타인의 노동’.

올해부터 전남은 특성화고에 이어 중3까지 노동인권 교육을 확대했다. 중3 학생들과 함께 하는 수업의 제목은 ‘노동아, 노올자’. 학생들이 하루 중 가장 기다린다는 시간이 학교에선 급식 시간, 집에서는 택배 오는 시간이란다. 그래서 주제는 급식 노동과 택배 노동. 첫번째 활동은 이름하여 ‘사물 속의 유령 찾기’. 모둠별로 학생들이 가장 먹고 싶은 급식을 그린 뒤, 그 급식이 우리 입에 들어오기까지 어떤 노동이 필요한지를 마인드맵으로 찾아보는 시간. 장래 희망이나 진로 탐색을 위해 알고 있는 직업의 종류를 적어보라면 많아야 30여종의 직업을 적을까 말까 한 학생들이 4절지 도화지가 모자라서 종이를 더 줘야 할 만큼 마인드맵을 뻗어나간다. 식자재의 생산, 포장, 판매, 수출입, 운송, 조리 과정의 노동은 말할 것도 없고 수의사, 광부, 금융, 도로, 건축, 광고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그 모든 노동력을 낳아 기르는 어머니의 노동까지도. 다음은 이 활동을 하고 나서 학생들이 적은 소감들이다. ‘노동이 이렇게 많고 다양하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수고로 우리가 먹는구나’ ‘이 많은 노동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게 놀랍다’ ‘여기서 한두가지 노동만 없어도 밥을 못 먹는다’ ‘부모님 생각이 난다’ ‘모든 노동은 중요하구나’ ‘감사히 먹겠다’…. 오늘 수업에선 이런 대답도 나왔다. ‘부끄러움’. 무슨 뜻이냐고 묻는 나에게 학생이 대답했다. “그동안 이런 걸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게 부끄러웠어요.”

이 활동을 하고 나면 학생들은 자신 있게, 이제 우리가 접하는 사물 속에서 노동을 보는 제3의 눈이 생겼다고 말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말한 학생들이 유통업체들의 광고 영상을 보여주고 나면 어김없이 일반 배송과 빠른 배송 중 빠른 배송을 고른다는 것. ‘로켓배송, 새벽배송, 총알배송, 슈퍼배송, 잠들기 전 주문하면 해 뜨기 전에, 오전에 주문하면 오후에 쓰윽.’ 광고 영상 하나로 학생들은 금세 철저한 소비자가 되어 택배에 얽힌 경험을 나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택배 노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소비자와 노동자, 그 자기 분열의 혼란 속에 다시 한번 토론이 일어난다. ‘제3의 눈이 금방 사라져서 죄책감이 든다’ ‘우리가 착한 소비자가 되면 문제가 다 해결되나’ ‘고객이 왕이라지만 사실은 호갱님이다’ ‘택배 노동자들도 퇴근하면 소비자다’ ‘우리의 노동력을 사는 건 기업이므로 결국 최종적인 소비자는 기업이다’…. 학생들 토론의 역동은 참 다채롭다.

그런데 꼭 한 반에 한명쯤은 이렇게 말하는 학생이 있다. “쌤, 희망이 생겼어요.” 왜냐고 물었다. “공부를 잘 못해도 세상엔 할 일이 이렇게나 많아요.” 한바탕 교실에 웃음이 터진다. 그 웃음과 함께 어쩌면 학생들은 알아차렸을까? 우리는 누구나 타인의 노동에 기대어 살고, 타인의 노동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의 노동에 존엄성을 불어넣는 일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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