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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레이더P] 고노 `무례` 발언과 조국 `이적`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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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외교라는 '물건'은 겉과 속이 다르다. 속으로는 분노가 끓고 그래서 '한 방'을 준비하지만 겉으로는 웃음을 띠고 깍듯한 의전을 보여준다. 언젠가 뒤통수를 칠 수도 있지만 그때까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모호한 언어, 절제된 태도로 실리를 챙긴다.

얼마 전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이 주일 한국대사를 초치했다. 말끔한 정장 차림의 우리 대사와 노타이 차림의 고노 외무상이 얼굴을 마주 봤다. 그런데 대사의 발언 중간에 느닷없이 말을 자르더니 자기 말을 쏟아냈다. 게다가 우리 측 설명에 대해 "무례하다"고 했다. 거친 감정을 드러낸 무례이고, '유아틱한' 흥분이었다.

이보다 며칠 전에는 수출 규제를 논의하기 위해 일본 경제산업성을 찾은 우리 실무진이 일본 당국자들과 대면했다. 전선이 늘어져 있고 간이 의자가 쌓여 있는 창고 같은 곳에 탁자가 마련됐다. 일본 실무진은 반팔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격식을 갖춰 정장을 입은 우리 실무진과는 달랐다. 더구나 입장할 때 일어서서 맞이하지도, 악수를 청하지도 않았다. 감정이 실린 노골적인 무례였다.

우리는 과거 이런 무례를 경험한 적이 있다. 바로 북한으로부터다. 남북이 만난 자리에서 입에 담기조차 거북한 폭언을 내뱉는가 하면, 얼굴을 붉히며 "불바다로 만들겠다"는 협박을 쏟아냈다. 이런 '유아틱한' 모습 탓에 북한의 '비정상' 이미지는 더욱 단단해졌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경제보복에 문재인 대통령은 수위를 조절하는 대응을 했다. 점차 반응의 강도가 높아지기는 했지만 '경고' 정도의 표현만 등장했을 뿐 "반일 감정은 갖고 있지 않다"고 강조했다. 또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는 역사적 사실을 거론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통해 은근히 일본을 겨냥한 수사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연일 페이스북을 통해 글을 올리고 있다. 하루에도 몇 건씩 올리곤 했는데, 적대의 감정이 묻어나는 글들이다. 애국과 친일을 이야기하더니 급기야 '이적'이란 표현까지 등장했다. 일본을 '적'으로 설정한 것이다. 조국 수석은 대통령의 '비서'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의 말과 글은 대통령의 생각으로 간주되기 십상이다.

사람끼리 관계에서도 흥분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출구는 좁아진다. 화해도 그만큼 어려워지고 일을 풀어가기에도 난감해진다. 분노와 적대가 치밀어 오르더라도 그 분노와 적대가 가져올 결과를 감당할 수 있는 순간까지는 속에 담아둘 필요가 있다. 바로 실리를 위해서다. 하물며 모호함과 절제가 지배하는 외교에서야 말할 것도 없다.

고노 외무상의 "무례" 발언과 조국 수석의 "이적" 글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감정의 배설인가 외교적 실리인가 말이다.

[이상훈 정치부 차장 겸 레이더P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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