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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바둑알·유리…사물의 소리도 담은 ‘비운의 선구자’ 곽인식 진면목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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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탄생 100주년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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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과 자연의 근원을 탐구하며 시대를 앞서간 작가 곽인식.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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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는 ‘곽인식’전을 보러갔다가 두 번 놀랐다. 먼저 작품 옆에 쓰여 있는 작품 연도를 보고 놀랐다. 흥미로운 작품이 있어 발표 시기를 찾아보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일렀다. 1960년대 작품일 것이라 생각하고 보면 1950년대 작품이었고, 1970년대 작품인 줄 알았는데 1960년대 작품이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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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식의 ‘작품 63’(1963). 돌로 유리를 깬 뒤 이를 다시 고정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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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국립현대미술관 야외 조각공원에 있는 15m짜리 돌탑의 작가명을 확인하고 나서였다. 미술관을 오가면서 여러 번 마주쳤지만 곽인식의 작품인 줄 몰랐다. 잔디밭 밖에서 잘 안 보이는 돌탑 아래에는 ‘WORK86-ENDLESS <끝없는> IN SIK QUAC 郭仁植’이라는 표지석이 붙어 있었다. 미술관 가기 전에 자료를 찾아보지 않았더라면 계속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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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야외조각공원에 있는 곽인식의 ‘끝없는’(1986). 홍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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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식(1919~1988)은 시대를 너무 앞서간 작가였다. 그리고 운이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대규모 회고전을 마련한 것이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다. 이마저도 없었으면 곽인식은 여전히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에 속했을 것이다.

곽인식은 1919년 경북 달성군(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37년 일본미술학교에 입학했고 1942년 한국으로 돌아와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49년 다시 일본으로 떠난 뒤에는 계속 일본 미술계에서 활동했다.

곽인식은 일찍부터 유리, 놋쇠, 종이 등 다양한 소재를 실험하며 사물과 자연의 근원을 탐구했다. 이 노력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지속됐다. 곽인식은 1969년 7월 잡지 ‘미술수첩’에 실은 글 ‘사물의 언어를 듣다’에서 “우주 속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물이 존재한다. 나는 일체의 어떤 표현 행위를 멈추고, 사물이 말하는 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1960년대부터 놋쇠 등으로 ‘실험’

일본서만 개인전 100회 이상 열어

재일 한국인 한계로 저평가 받아


물성(物性)을 탐구하는 현대미술의 경향은 1960년대 이후에 나왔다. 서구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이탈리아어로 ‘가난한 미술’)는 1960년대 후반 이탈리아 등에서 일어났고, 일본에서는 1970년대 모노하(物波·School of Things)가 크게 유행했다. 곽인식은 1960년대 초반부터 사물과 자연의 근원적 형태인 ‘점·선·원’에 주목했다. 원색의 물감에 석고를 발라 두꺼운 질감을 표현한 모노크롬(단색) 회화부터, 캔버스에 바둑알, 철사, 유리병, 전구 등을 부착해 재료 자체에 주목한 작품까지 내놨다. 유리를 돌로 깨뜨린 뒤 다시 붙이는 방식으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작품들도 이 시기에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의 많은 작가들이 곽인식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학술 심포지엄의 주요 주제도 ‘곽인식과 일본 작가들과의 교류’ ‘곽인식 작품이 한국미술계에 미친 영향’이다.

곽인식은 일본에서만 개인전을 100회 이상 여는 등 끊임없이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 평단의 주목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이번 전시를 준비한 국립현대미술관 박수진 학예연구관은 “같은 성과를 낸 화가이더라도 일본 자국민이나 서구인을 먼저 조명하는 사회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다”며 “재일한국인이라는 한계로 예술적 성취에 비해 저평가된 게 사실이고 (이후) 현지 평론가들조차도 이 점을 반복해 언급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도 1985년에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곽인식은 1988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번 전시는 한·일 양국에 있는 작품 100여점과 미공개 자료 100여점을 통해 곽인식의 선구자적 면모를 다시 짚어보려는 시도다. 전시는 크게 3개 공간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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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식이 일본에서 사용하던 작업실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재현했다. 홍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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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격인 ‘현실 인식과 모색(1937년∼1950년대 말)’에서는 초기작 ‘인물(남)’(1937), ‘모던걸’(1939)과 패전 후 일본 현실을 반영한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 1955’(1955) 등이 전시된다.

한·일 양국 작품 등 200여점 전시

시대 앞선 ‘물성 탐구’ 재조명 기회

내달엔 ‘한국 미술계 영향’ 학술회


2부 ‘균열과 봉합(1960년대∼1975년)’에서는 곽인식이 본격적으로 물성을 탐구한 작업으로 채워졌다. 3부 ‘사물에서 표면으로(1976∼1988년)’에서는 돌, 도기, 나무, 종이에 먹을 활용한 작업을 소개한다. 강에서 가져온 돌을 쪼개어 다시 붙이고, 나무를 태워 만든 먹을 나무에 칠해 인간의 행위와 자연물의 합치를 시도했다. 또 한지의 앞뒤에 큰 점을 찍어 캔버스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공간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큼직큼직한 작품도 좋지만, 회고전이 아니면 보기 어려운 자료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작품 구상과 건물 디자인 등이 담긴 드로잉은 소소하지만 ‘시대를 앞서간 작가’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곽인식이 탐구한 물성이 시대를 앞서 어떻게 발현되고 전개되었는지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전시”라며 “일본과 한국 화단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곽인식의 위상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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