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03 (금)

[손호철의 이탈리아 사상기행](2)마키아벨리가 묻는다 “시대의 근본적 변혁,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가”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마키아벨리를 찾아서 - 피사와 이몰라

경향신문

피사를 가로지르는 아르노강. 피사는 피렌체의 식민지였으나 혼란 속에 독립을 선언했다. 마키아벨리와 다빈치는 이 강의 수로를 바꿔 피사를 고사시키려 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전인적 인간’으로 불리는 다빈치

체사레의 북부정벌을 도우며

옳고 그른 일인지에 고민 없이

기능적 엔지니어 역할만 수행

정치적 인간으로선 부족함 많아


역사상 인간의 모든 능력을 가진 가장 ‘전인적 인간’은 누구일까? 많은 사람들은 세계적인 화가, 조각가이자 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답할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미 인정을 받은 ‘대가 예술가’였던 다빈치와 달리 아직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일개 관리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같은 시대(르네상스)에, 같은 공간(피렌체)에서 활동한 두 거인이다. 특히 두 사람은 두 개의 프로젝트에 같이 참여한 일종의 ‘동료’였다.

피렌체에는 아름다운 아르노강이 흐르고 있다. 마키아벨리가 매일 걸어서 출근했던 베치오 다리도 바로 이 강을 가로지르고 있다. 이 강을 따라 서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려 바닷가 근처에 이르면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가 나타난다. 나는 피렌체를 떠나 피사의 입구에 도착해 아르노강을 보자 차를 세웠다. 피사를 향해 흐르고 있는 아르노강이 바로 마키아벨리와 다빈치가 같이 수행한 프로젝트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당시 피사는 피렌체의 항구도시이자 식민지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이탈리아에 진군해 오고 이탈리아가 혼란에 빠지자 피사는 독립을 선언했다. 피사를 잃으면 바다로 접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피렌체는 필사적으로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주민들이 시민군을 만들어 똘똘 뭉쳐 저항하는 피사를 돈으로 산 용병에 의존하는 피렌체가 정복할 수는 없었다.

경향신문

피사를 상징하는 피사의 사탑.


결국 피렌체는 피사를 직접 정복하는 대신 아르노강의 방향을 바꿔서 피사로 흐르는 물길을 끊고 피렌체까지 배가 들어올 수 있게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을 만들었다. 이 엄청난 프로젝트를 맡게 된 사람이 바로 나름 뛰어난 군사전략가였던 마키아벨리였다. 그는 당시 최고의 두뇌였던 다빈치를 끌어들여 둘은 역사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다빈치의 설계와 감독으로 운하공사에 착수했다. 많은 노력 끝에 운하를 만들었지만 운하는 너무 얕아 강의 방향을 바꿀 수 없었다. 다시 운하를 더 깊이 파려 했지만 홍수가 기존 운하까지 쓸어가버렸다. 이 공사는 당시의 기술로는 불가능한 프로젝트여서 결국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만일 이 프로젝트가 성공해 피사가 고사당했다면, 마키아벨리와 다빈치는 어떻게 평가받았을까? 이 같은 생각을 하며 아르노강을 바라보자, 이 프로젝트의 실패는 피사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두 거인의 명성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향신문

아르노강 수로변경 프로젝트는 실패했지만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창설한 시민군을 동원해 종국에는 피사를 정복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공화정이 무너지자 그는 공직을 떠나야 했고 이후 피렌체의 피사 공격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표명한다. 피사와 협상을 하지 않고 무조건 공격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는 자유에 기초한 “공화국이 타인의 자유를 공격하는 것이 위험”하고 “자신들의 자유와 안전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설사 전쟁에서 승리하더라도 “정의 없는 승리는 결코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지킬 수 없는 것을 차지하지 말아야 한다”. 마키아벨리가 잘 이해하고 있듯이, “남을 노예로 만들어 놓고 자신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경고는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서구 민주국가들의 제3세계에 대한 만행에 대한 경고로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피사를 떠나 북동쪽으로 두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작은 도시인 이몰라로 향했다. 볼로냐 외곽에 위치해 있는 이몰라는 로마나라고 부르는 북동 지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한때 포뮬라 원의 경기장으로 유명했던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517년 전인 1502년 가을 마키아벨리와 다빈치는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을 따라 이몰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앞에는 <군주론>의 모델이라고 일컬어지는 체사레 보르자가 행군을 하고 있었다. 지난 글에서 지적했듯이 당시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는 강력한 절대왕정이 등장하고 있었지만, 이탈리아는 피렌체 등 작은 여러 도시국가들로 나뉘어 있었다. 교황직할국도 그중의 하나였다. 이를 생각하며 로마에서 바티칸을 방문했었다.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바티칸박물관 반대쪽인 왼쪽으로 가면 스위스 용병들이 아직도 옛날 복장으로 경비를 서고 있는 문이 나온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사신으로 자주 교황청을 방문했던 곳이다. 이 문을 지나 더 가면 일반인들이 출입할 수 있는 바티칸 입구가 나오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면 바티칸 건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당시 교황의 서자였던 체사레는 북동부 지역(로마나)을 정벌하고, 궁극적으로는 이탈리아를 통일해 왕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이탈리아에 진주해 있던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북동쪽의 작은 공국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경향신문

<군주론>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체사레가 정벌한 이몰라성.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체사레는 이 같은 군사작전에 피렌체도 같이하기를 원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외교사절로 체사레와 동행하며 비공식적으로 군사적 자문도 해주고 그의 동향을 파악해 피렌체에 보고하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지적 호기심에 충만한 다빈치는 그동안 열심히 해온 회화에 싫증을 느끼고 새로운 무기 개발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터였다. 그는 체사레의 수석 군사엔지니어로 이 군사작전에 동행한 것이다. 이몰라는 체사레의 군대를 보고 항복했다. 다빈치는 이몰라에 들어가자마자 체사레를 위해 이몰라의 지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는 그동안의 지도들과 달리 하늘에서 이몰라를 내려다본 혁신적인 지도였다. 인공위성 사진을 연상케 하는 이 지도는 시대를 앞서간 다빈치의 천재성을 증명한 또 다른 걸작으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

나는 이번 여행을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역사상 가장 완벽한 전인적 인간’이라는 평가에 의문을 갖게 됐다. 그는 최소한 사회의식을 가진 ‘정치적 인간(호모 폴리티크)’이란 면에 있어서는 문제가 많았다. 한마디로, 그는 정치적 의식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즉 체사레의 북부정벌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피사를 겨냥한 수로변경 공사가 옳은 것인지에 대한 정치적 의식 없이 그저 ‘기능적 엔지니어’로 그 일을 수행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유배, 파문, 재판 등 고난을 당한 단테, 마키아벨리, 갈릴레오와 같은 비슷한 시대의 피렌체의 천재들과는 달리 별 시련을 겪지 않고 평탄한 삶을 살고 장수했던 것 같다. 이 점에서 다빈치는 천재적인 물리학자였으면서도 정치적 의식을 가지고 반전운동가와 사회주의자로 활동했던 아인슈타인이나, 세계적인 화가였지만 ‘게르니카’라는 명작을 통해 파시스트들에 의한 스페인의 게르니카 주민들의 학살을 고발한 피카소보다는 부족했다.

경향신문

인류 최고의 ‘전인적 인간’으로 평가받는 다빈치의 흉상.


통일된 국민국가 이탈리아라는

역사적 과제 고민한 마키아벨리

우익포퓰리즘 부상한 현시대에

실현 불가능하지만 필요한 과제

어떻게 고민해야 하는지를 시사


이몰라의 유적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로카 스포르자(스포르자 성)는 남아 있었다. 체사레가 정복하기 전의 지배자였던 스포르자가 건설한 이 성은 잘 보존되어 있는 아름다운 성으로 이제는 여름에 영화제를 연다고 한다. 다빈치, 마키아벨리라는 두 천재와 ‘새로운 군주’ 체사레가 이탈리아 통일의 야심을 불태우며 거닐었을 역사적인 이 성은 이제 해자에는 물이 말라 잡초만 무성했고, 벽돌 사이에 난 구멍에는 비둘기들이 집을 지어 놓고 살고 있어 지나간 세월을 증언해주고 있었다.

결국 한때는 체사레에게, 그리고 유배 후에는 메디치가에 기대하며 마키아벨리가 가졌던 가장 큰 화두는 <군주론>의 결론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야만족의 지배로부터 이탈리아를 해방”시키고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것이었다. 즉 새로운 통일국가, ‘새로운 국민국가’ ‘새로운 공화국’을 창건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 20세기 프랑스의 천재 좌파 철학자인 알튀세르는 재미있는 해석을 제공한다. 마키아벨리는 새로운 국가를 구상하며 두 가지 계기를 고민하는데 첫 번째 계기는 시작의 계기이고 두 번째 계기는 지속과 확장의 계기였다. 다시 말해, 첫 번째는 어떻게 하면 이탈리아를 통일해 새로운 통일국가를 건설하느냐는 것이고, 두 번째는 어떻게 하면 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확장하느냐는 것이다. <군주론>은 첫 번째 ‘시작의 계기’와 관련한 책으로, “모든 절대적 시작은 혼자여야 하고, 창건자의 절대적 고독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그는 새로운 군주에 대해 고뇌한다. 반면에 <로마사 논고>는 인민 속에 뿌리내리지 않으면 안되는 두 번째 계기(확장)에 대한 저서이기 때문에 공화정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강력한 군주를 이론화한 ‘절대군주제’의 이론가가 아니라 ‘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정치적 조건’에 대한 이론가라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절대군주정의 시대에 도시국가라는 피그미들로 갈가리 찢어져 외국의 지배를 당하고 있는 이탈리아에 ‘필요불가결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꿈’인 새로운 국민국가의 창립에 대해 외롭게, 홀로 고민했다는 점에서 ‘마키아벨리의 고독’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좌파 이론가인 그람시는 파시즘의 감옥에 갇혀 흔히 권모술수의 이론가라고 불리는 마키아벨리, 그리고 절대군주에 대한 책으로 일컬어지는 <군주론>을 불러내 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 자신의 책을 ‘현대 군주론’이라고 명명했던 것이다. 그람시는 마키아벨리와 마찬가지로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반동의 시대에 또 다른 ‘필요불가결하지만 불가능한 꿈’을 고민했던 것이다. 그것은 노동해방과 ‘사회변혁’이라는 ‘좌파’적 꿈이었다. 20세기 초의 이론가인 그람시는 자본주의사회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한 만큼, 아직도 우리들에게 많은 함의를 갖고 있으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반면에 마키아벨리는 격변의 시대에 지식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뇌에 대해 시사해주는 바는 크지만, 현대사회가 마키아벨리가 고민하던 시대와 너무도 달라졌기 때문에 우익포퓰리즘의 부상이라는 현재의 시대와 별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또 직접적으로는 별 교훈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람시가 그러했듯이, 그가 꿈꾸었던 국민국가의 성립과 같은 현재의 시대적 과제, 즉 실현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필요불가결한 과제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이에 대해 어떻게 고민해야 하는가에 대해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그는 내게 묻고 있었다. “나는 국민국가의 시대에 미니어처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탈리아를 바라보며 ‘통일된 국민국가로서의 이탈리아’라는 역사적 과제를 이룰 수 있는 주체(‘새로운 군주’)에 대해 외롭게 고민했다. 사회적 양극화로 1 대 99 사회와 헬조선으로 변해가고 있는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적인 지구화, 그리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우익포퓰리즘이 만연하고 있는 현시대에 근본적인 변혁을 통해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건설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이루어낼 수 있는 주체인 ‘21세기의 군주’는 누구인가? 이에 대해 당신들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가?”

이몰라를 끝으로 마키아벨리 기행을 마치고 그람시를 찾아 떠나면서 떠오른 것이 한국의 현실이었다. 세계, 특히 유럽은 우익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고 있지만 다행히 우리는 박근혜 덕분에 역사적인 촛불항쟁을 통해 문재인 정부를 출범시켰고 세계적 추세와 달리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민주주의의 전진을 경험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민생악화와 인사실패, “인사가 뭐가 문제냐”는 등의 오만으로 개혁의 열기가 사라지고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이 떨어지는가 하면, 우리 사회에도 우익포퓰리즘의 증후가 나타나고 있다(물론 자유한국당의 연이은 막말 등 자살골로 다행히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 하락에 일시적으로 제동이 걸렸지만 말이다). 이와 관련, 떠오른 것이 마키아벨리의 운명론이다. 마키아벨리는 일찍이 인간사를 포르투나(fortuna)와 비르투(virtu)로 설명한 바 있다. 포르투나가 운칠기삼의 ‘운’이라면, 역능이라고 번역하는(쉽게 말해 실력이라고 할 수 있는) 비르투는 ‘기’이다. 그 역시 운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운명이란 우리 행동 절반에 대해서만 중재자이며, 나머지 절반은 대체로 우리 인간이 통제한다”. “호의와 행운은 너무 변덕스럽고 불확실한 데다가, 이들에게는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이 없다.” 한때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는 ‘새로운 군주’로 기대했던 체사레는 교황의 아들이라는 행운과 프랑스의 도움으로 승승장구했지만, 운이 다하자 추락하고 말았다. 마키아벨리의 지적대로, 자신의 역능이 아니라 적이 두는 ‘악수’나 행운에 기대는 정치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촛불정신을 어느 정도라도 실현하고 우익포퓰리즘을 막기 위해서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처럼 “사자의 힘과 여우의 교활함”을 모두 갖추어야 한다.

손호철 | 서강대 명예교수

최신 뉴스두고 두고 읽는 뉴스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