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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글자로 세상에 돌직구를 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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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크루거

글자를 예술로 만든 현대미술 거장… 서울에서 아시아 첫 개인전 열어

'충·분·하·면·만·족·하·라.'

'제·발·웃·어·제·발·울·어.'

미술관 벽면에 걸린 여덟 자의 한글에 관람객은 눈을 빼앗긴다. 오로지 글자로만 이뤄진 이 선동의 이미지가 자성(自省)을 유도하는 까닭이다. 미국 현대미술계 거장 바버라 크루거(74)는 '글자야말로 가장 강력한 그림'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다. "영상의 시대로 바뀐 지 오래라지만 트위터를 보라. 지금도 셀 수 없을 정도의 텍스트가 넘쳐나고 있다."

그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12월 29일까지 열린다. 포스터처럼 도발적인 활자를 전면에 부각해 관람객의 내적 질문을 유도하는 바버라는 본지 서면 인터뷰에서 "질문 자체가 내 작업 방식"이라며 "우리가 서로 어떻게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망해왔는지 다룬다"고 했다. 콜라주·설치·영상 등 44점의 전시작 중 단연 시선을 끄는 건 최초의 '한글' 작품이다. 최신작 '충·분·하·면·만·족·하·라'는 가로 21m·세로 6m 크기의 벽면을 여덟 글자로 채운 것이다. 단순명료한 글씨체와 네모 칸의 흰 글자는 즉각 메시지를 대뇌에 주입한다. 그는 "한글은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전달한다"며 "조형적 관점에서도 매우 매력적인 글자"라고 했다.

조선일보

강렬한 텍스트를 내세워 관람객의 자성을 유도하는 바버라 크루거(오른쪽)가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와 조지 오웰의 문장으로 전시장을 채운 대표작 ‘Forever’ 전경. /정상혁 기자·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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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사에서 10년간 편집 디자이너로 일했다. 옛 흑백 사진이나 그림 위에 함축적인 글자를 중첩하는 특유의 시각 언어가 여기서 발원했다. "과거의 직업이 현재 내 작품에 반영됐다고 본다. 하지만 파생된 의미의 차원은 현저히 다르다." 1980년대부터 본격화한 이 작업은 페미니즘 및 사회 비판 운동을 가열해왔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1987) '당신의 몸은 전쟁터다'(1987) 등이 그 대표적 예다. 200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평생공로 부문 황금사자상을 받기도 한 그는 "나는 모든 예술이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며 "권력·성·사랑·증오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하려 한다"고 했다. 대체로 그는 '빨간 네모' 안에 '하얀 글자'를 넣음으로써 시각적 집중도를 증폭하는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빨강 네모 '슈프림(Supreme)' 로고에 직접적 영향을 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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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시아 개인전을 기념해 제작한 최초의 한글 작품 ‘충분하면만족하라’ ‘제발웃어제발울어’(위부터). /아모레퍼시픽미술관·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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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빨강이 한글에도 적용됐다. '제·발·웃·어·제·발·울·어'는 개막 이틀을 남기고 가장 마지막에 설치된 작품으로, 글자를 즐기려면 그 맞은편에 걸린 한 장의 사진을 먼저 봐야 한다. 한 여자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웃는지 우는지 알 도리가 없다. 사진을 등지고 돌아서면 이 여덟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현대인의 감정 과잉 혹은 소멸에 대한 자조일 수도, 여성 운동을 위한 표어일 수도 있다. 미술관 측은 "해석은 전적으로 관람객의 몫"이라고 했다.

대표작 'Forever'(2017)는 이 미술관의 가장 큰 전시장(174평) 전체를 채운다. 벽면엔 거대한 'YOU'가 새겨진 볼록 거울 이미지 속에 '지난 수세기 동안 여성은 남성의 모습을 2배 확대해 비추는 마력의 거울 역할을 해왔음을 당신은 알고 있다'(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는 문장이, 바닥엔 '만약 당신이 미래의 그림을 원한다면 인간의 얼굴을 영원히 짓밟는 군화를 상상하라'(조지 오웰 '1984')가 새겨져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권력은 문화를 통해 어떻게 형성되는가 묻고자 한다." 다른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관람객은 이 활자 위를 걸어야만 한다.





[정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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