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둥성 선전 고층 빌딩 벽면에 투사된 중국 오성홍기 모습./웨이보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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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민 1000여명이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의 ‘완전 철폐’를 주장하며 홍콩국제공항 여객터미널에서 시위를 벌였던 26일(현지 시각) 밤, 홍콩에서 멀지 않은 중국 광둥성 선전(深圳)의 수변가를 따라 늘어선 고층 빌딩 벽면은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五星紅旗)’로 뒤덮였다.
‘홍콩 보란 듯’ 선전시가 기획한 레이저 쇼였다. 홍콩에서도 육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스케일이 엄청났다.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에 올라온 관련 영상에는 중국 네티즌 수만명이 댓글을 달았다. ‘가장 아름다운 붉은 색’이란 내용도 있었고, ‘홍콩을 중국의 일부로서 지지한다’는 문구도 눈에 띄었다.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홍콩에서 송환법 반대 시위가 날로 격화하는 상황에서 홍콩시민들을 향해 ‘중국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담은 쇼"라고 분석했다.
광둥성 선전 고층 빌딩 벽면에 투사된 중국 오성홍기 모습./웨이보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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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인 27일 홍콩 시위 현장에는 미국 성조기(星條旗)가 등장했다. 지난 21일 홍콩 위안랑(元朗) 지역에서 발생한 송환법 반대 시위자들을 향한 ‘백색 테러’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진행된 시위였다. 시위대 중에는 영화 ‘어벤져스’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하나인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든 시민도 있었다. 이날 시위에는 이튿날까지 도합 29만명에 이르는 시민이 모였다. 홍콩 시위에 성조기가 등장한 것을 두고 반중(反中) 성향의 홍콩 시민들이 이번 송환법 반대 시위에 미국의 개입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27일(현지 시각) 홍콩 송환법 반대 시위에서 영화 '어벤져스'복장을 한 송환법 반대 시위자의 모습. /EPA=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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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만(灣) 하나를 사이에 둔 선전과 홍콩 사이에 이런 신경전이 오가는 데는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에 대한 시각 차이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전 세계 13개 언어로 뉴스 서비스를 제공하는 프로젝트 신디케이트는 이와 관련해 "홍콩의 지역 내 경제적 불만이 대규모 시위를 촉발시킨 한 가지 이유"라고 분석했다.
두 도시는 지역 내 경제 패자(霸者) 자리를 두고 경쟁관계에 있다. 텐센트(騰訊), 화웨이(華爲) 등 거대 IT 기업의 본사가 있는 선전은 중국이 중점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도시다. 반면 외국 기업이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각광받던 ‘동양의 진주’(東方明珠) 홍콩은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점차 쇠락하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민주주의 쟁취라는 정치적 목적 외에도 시위의 배경에는 선전에 밀린 홍콩의 경제력이 있다는 것이다.
28일(현지 시각) 송환법에 반대하는 홍콩 시민들의 '노란우산' 행렬에 일부 시민들이 성조기를 들고 합류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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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까진 선전은 ‘홍콩에 빌붙은 어촌도시’라고 불렸었다. 개혁·개방이 시작되던 1979년에 선전의 GDP는 1억9600만 위안으로 홍콩의 0.2%에 불과했다. 그러나 1980년 선전이 경제특구로 지정된 지 40년 만에 두 도시의 처지는 역전됐다. 지난해 선전의 GDP는 2조4222억 위안으로 홍콩(2조4001억 위안)을 앞질렀다. 화물 처리량도 홍콩(세계 5위)은 선전(세계 3위)에 뒤졌다.
1990년대 우리나라, 대만, 싱가포르와 함께 ‘아시아의 4룡(龍)’으로 불리던 홍콩이 선전에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관련 중국 환구시보는 "선전의 경제 성장 때문에 (이웃한) 홍콩의 성장이 정체를 겪게 됐다는 믿음이 퍼지면서 홍콩 시민들 사이에서 경제적인 불안도 커졌다"고 분석했다.
선전을 포함한 광둥성 지역은 중국 고성장(高成長)의 엔진 역할을 해 왔다. 1979년~2017년 사이 광둥성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12.6%로 중국 전체 평균보다 3.1%포인트, 전세계 평균 보다 9.7%p 높았다. 1989년에는 그간 중국 내 국내총생산(GDP) 1위였던 장쑤성을 제치고 중국 최대 경제 지역으로 부상한 데 이어, 1998년 싱가포르, 2003년 홍콩, 2007년 대만까지 잇따라 추월했다. ‘아시아 4룡’ 중 세 마리를 뛰어넘은 것이다. 나머지 한마리 였던 한국 역시 2017년 기준으로 GDP의 87% 수준까지 광둥성에 따라잡혔다. 이런 추세라면 내년에는 한국의 경제규모를 뛰어넘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은 광둥성 지역을 미국의 ‘실리콘 밸리’를 뛰어넘는 경제 특구로 키우려 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2017년 광둥성 내 선전·광저우 등 9개 도시와 홍콩·마카오를 하나로 통합해 거대한 광역경제권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른바 웨강아오 대만구(大灣區·Great Bay Area)다. 웨(粤)는 광둥성, 강(港)은 홍콩, 아오(澳)는 마카오를 뜻한다. 이를 위한 인프라 구축은 이미 완성 단계에 돌입했다. 지난해 10월 8년 간의 공사 끝에 이들 지역을 잇는 전체 길이 55㎞의 세계 최장 해상대교인 ‘강주아오(港珠澳)대교’를 완성했고, 한달 앞선 9월에는 총연장 142㎞의 ‘광선강(광저우-심천-홍콩) 고속철’도 전구간 개통했다.
홍콩 시민들은 선전을 필두로 한 광둥성 지역이 역내 경제 패권을 쥐고 흔드는 상황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홍콩 경제가 대만구 경제 특구에 편입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중국에 종속된다는 의미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997년 홍콩 주권반환 이후 중국의 자본과 인구가 몰려들면서 홍콩의 부동산 값이 폭등하는 등 부작용을 이미 겪었기에 걱정이 커질 수밖에 없다.
홍콩에서는 시 주석이 추진하는 웨강아오 대만구 광역 경제권이 완성되면 중국 본토의 도시들은 융성하겠지만, 홍콩의 장기적인 이익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강주아오대교 건설과 광선강 고속철 건설에 대해서도 중국 본토와 홍콩·마카오 간 인적, 물적 교류를 늘려 장기적으로 두 지역의 경제를 중국으로 흡수하기 위한 ‘대륙식 통합 프로젝트’라는 비판도 나온다.
송환법 반대 시위의 이면에는 홍콩의 ‘홍색화(紅色化·중국 경제력에 종속되는 현상)’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가 있다. 이를 잘 아는 중국 정부가 홍콩을 향해 ‘오성홍기 레이저쇼’를 벌인 것은 아마도 경제 성장을 앞세운 장기적인 통합 프로젝트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일 것이다.
[김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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