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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4 (화)

‘탈진실’ 아베 대항 무기는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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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진실보다 ‘정치적 이해’ 앞세운 아베…

문 대통령 ‘한반도 평화 경제’ 통할까


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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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자충수일까. 8월6일 아베 총리는 히로시마 원폭 74주년 위령제 직후 기자회견에서 “한일청구권협정을 한국이 일방적으로 위반하고 있다. 국교 정상화의 기반이 된 국제조약을 깨뜨렸다”며 “현재 한-일 관계를 생각할 때 최대 문제는 국가 간 약속을 지키느냐 아니냐의 신뢰 문제”라고 주장했다. 발언 가운데 ‘협정 위반’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을 겨냥한 말이고, ‘최대 문제’는 화이트리스트(수출 심사 간소화 우대국) 배제 등 수출규제로 촉발된 현 상황을 일컫는다.

아베 ‘한국 강제징용 판결’ ‘대북제재 위반’ 언급



한국 외교부는 기다렸다는 듯 입장을 내놨다. 조세영 외교부 제1차관은 같은 날 “아베 총리는 한-일 관계 갈등의 원인이 청구권 문제가 본질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며 “일본의 부당한 경제 조치가 과거사 문제에 기인한 경제보복이라는 것이 증명됐다”고 비판했다. 아베 총리의 이번 발언은 화이트리스트 배제가 안보상 이유에 근거한 우대 조치의 철회일 뿐 과거사 판결에 대한 경제보복이 아니라는 일본 정부의 기존 주장과 어긋난다.

이 대목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사실은, 강제징용 판결을 겨냥한 아베 총리의 언급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한 달 전인 7월7일 아베 총리는 일본 <후지TV>에 나와 한국 수출규제와 관련해 “한국이 ‘(대북)제재를 지키고 있다’고 하지만, 징용공 문제에 대해 국제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명확하니 무역 관리도 준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했다. 발언에서 알 수 있듯 아베 총리는 수출규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두 가지를 문제 삼는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어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과 한국의 (북한)제재 위반이다.

현재 논쟁은 한일청구권협정에서 개인 위자료 청구권 인정 여부에 집중된 상태다. 대법원은 한일청구권협정에서 일본 정부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부인했으니, (개인의)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 적용 대상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는 논리를 근거로 강제징용 피해자의 손을 들었다.

반대편에는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든 청구권 논란이 종식됐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한국에서도 일본 정부의 입장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송언석 자유한국당 의원이 8월1일 “만약에 청구권협정이 그동안 개인의 청구권이 남아 있었다고 하면 왜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에, 1970년(에)도 두 번에 걸쳐서 특별법을 만들어서 국가가 보상을 해줬겠느냐. 보상을 해줄 때 개인의 청구권도 다 포함하는 걸 전제로 해서 개인한테 보상을 해줬다”고 주장했는데, 개인의 의견으로만 볼 수는 없다.

8월6일 일본 통신사인 <교도통신>은 국제사회를 향한 일본의 여론전에 아베의 과거사 발언이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문제는 오히려 그다음이다. “징용공 문제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무역 관리도 준수하지 않을 것”이라는 아베 총리의 발언을 두고, 한국 정부는 지금까지 전략물자 관리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엄격하다는 ‘사실’을 근거로 정당성을 알려왔다. 하지만 ‘그러할 것’이라는 미래형 문장은 과거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이것을 했으니 저것도 할 것이란 황당한 논리에 불과하다(일본 정부는 한국의 제재 위반에 대해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미래형 진실’ 억지 주장으로 동북아 격랑



그렇다고 이를 무시하기에는 문제가 간단치 않다. 아베 총리가 한-일 관계를 최악으로 밀어넣은 이른바 ‘미래형 진실’이라는 형용모순은 국제사회에서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같은 리더의 전유물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있지도 않은 사실을 진실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정치적 이익을 얻은 예는 숱하다. 2017년 2월 트럼프는 한 집회에서 “어젯밤 스웨덴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언급했다(실제로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스웨덴 이민자 거주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트럼프는 이후 자신이 옳았다는 말을 강조했다.

이뿐만 아니다. 같은 해 “오바마가 트럼프 타워에 도청 장치를 설치했다”는 트럼프의 주장도 트럼프 보좌진이 러시아의 정보 수집 활동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진실로 둔갑했다. 러시아와 오바마 정부의 연관성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트럼프나 그를 둘러싼 여론은 그 자체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같은 해 3월23일치 미국 일간지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의 말을 분석하며 “(트럼프는) 자신의 말이 진실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다. 트럼프 대통령은 어떻게든 그 말을 진실로 만들거나 적어도 그 말이 진실이라고 주장할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와 관련해 미국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는 책 <포스트 트루스>에서 “(트럼프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발언은 자신의 이익을 증진해준다는 점에서 진실”이라고 밝혔다. 이대로라면 아베 총리에게 현재의 수출규제가 한국의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냐 아니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한국이 제재 위반을 할 것이라는 신념이고 그것의 현실화다. 제국주의 침략을 부정하는 일본 보수가 트럼프의 탈진실과 만나 동북아를 격랑에 빠뜨린 셈이다.

아베 총리의 발언 진위를 따질 틈도 없이 공은 우리에게 넘어왔다. 아베를 맞상대하는 문재인 대통령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부류와는 확연히 다르다. 오히려 문 대통령은 자신의 패를 답답할 정도로 다 드러낸다. 이는 대선 직전인 2017년 4월 내놓은 대통령 후보 당시 공약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공약으로 본 문 대통령의 한-일 관계에 대한 인식은 “파국”이다. 여기서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한-일 관계를 정상으로 돌려놓기 위해 ‘역사 문제의 진정한 반성과 실용적 우호협력의 동시 추진’이라는 원칙을 동력으로 삼겠다는 뜻을 밝혔다. 세부안으로 “(박근혜 정부 때 한-일 간 맺은) 12·28 위안부 합의는 재협상을 통해 피해자들이 인정하고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수준의 합의를 도출하겠다”며 위안부 합의의 파기 가능성을 열었다.

문 대통령의 ‘패’는 “역사 반성과 우호 협력”



집권 뒤 문 대통령은 이와 관련한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었고 결국 합의는 파기됐다. 주목할 대목은 그다음이다.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는 효용성 검토 후 연장 여부를 결정한다’고 기술한 것이다. 사실 대선 공약이 후보의 강점을 부각하고 약점은 최소화하는 전략적 분배 속에 구성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공염불인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고구마’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원칙을 고집하는 문 대통령의 행보에서 공약집은 정해진 궤도에 가깝다. 여권 일부에서 주장하는 지소미아 파기 또한 미국의 구심력이 강력하지만 현실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뒤 강제징용 문제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문 대통령이 전범기업 미쓰비시를 상대로 한 강제징용 피해자 재판의 변호인으로 활동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문 대통령은 당시 원고 쪽 대리인으로 2006년 11월까지 재판에 직접 참가했다.

10년이 흐르고 취임 첫해인 2017년 8월14일 청와대 오찬 행사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강제징용 피해자를 함께 초대했다. 청와대 행사는 그 자체로 메시지라는 점에서 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를 같은 선상에 놓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문 대통령은 “총칼로 항거했던 독립투사와 강제징용으로 희생당한 국민 삼천만의 한결같은 염원은 오직 조국 해방”이었다며 독립투사와 강제징용 희생자의 뜻이 다르지 않았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는 다음날인 광복절, 일본에 대한 강한 요구로 이어졌다. 문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한-일 관계의 걸림돌은 과거사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 문제를 대하는 일본 정부의 인식 부침에 있다”며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징용 등 한·일 간 역사 문제 해결에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국민적 합의에 따른 피해자 명예회복과 보상, 진실 규명과 재발 방지 약속이라는 국제사회의 원칙이 있다”고 말했다.

강제징용만 놓고 보면 문 대통령과 반대편에 서 있었던 사람은 아베 총리 말고 또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다. 지난 5월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 농단 재판 과정에서 박근혜 정부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었던 김규현 전 수석의 업무일지에 담긴 내용은 박 전 대통령의 속마음을 날것 그대로 드러냈다.

2015년 12월 김 전 수석은 박 전 대통령에게 위안부 합의를 보고하는 과정에서 “강제징용 사건 관련 정부 의견 분명하게 조속히 보낼 것. 개망신 안 되도록. 세계 속의 한국 유념. 국격 손상. 지혜롭게 처리하라”는 박 전 대통령의 말을 받아적었다. 위안부 합의를 앞두고 대법원에 의견을 전달해 최대한 판결을 뒤로 미루려 한 뜻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나온 거친 언사는 ‘강제징용’을 박 전 대통령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한일청구권협정의 당사자인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성과에 흠이 날까 마음이 상했던 것일까.

오웰의 교훈 “지성인 의무, 사실을 거듭 외치라”



화이트리스트 배제는 현실화됐고 문 대통령은 8월2일 국무회의 발언에서 “다시는 지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의 부당한 경제보복에 상응하는 조처를 단호하게 해나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정국을 바꿔놓을 만한 묘수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까지 자신들의 셈법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8월5일 문 대통령은 일본발 무역보복 조처 대책 중 하나로 평화 경제를 꺼내들었다.

6월29일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발언에서 “한반도의 평화 경제 시대가 오면 세계경제에 새 성장 동력이 될 것”이라고 말한 내용의 연장선에 있었다. 고구마 같은 특유의 원칙론이었지만 “북한 중독”(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허무맹랑한 미사여구”(유승민 바른미래당 전 대표) 등 야권의 비판이 줄을 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사흘이 지나고 문 대통령은 “일본은 당초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을 이유로 내세웠다가, 이후 전략물자 수출 관리 미비 때문이라고 그때그때 말을 바꿨다”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쓸 카드가 마땅치 않다.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향해 진실을 가리는 집단 앞에 할 수 있는 행동과 말은 한정돼 있다.

“우리는 명백한 사실을 거듭 외치는 것이 지성을 가진 사람의 첫 번째 의무인 절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조지 오웰)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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