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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3 (월)

‘페미’라는 이유로 신상 털렸는데, 오히려 역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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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일러스트 현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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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성이 페미니즘 관련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사이버불링’(인터넷에서 특정인을 괴롭히는 행위)을 당하고도 역고소 및 민사소송을 당해 지속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모씨(28)는 각종 페미니즘 활동에 참여하며 자신의 블로그에 관련 글을 꾸준히 쓰고 있다. 블로그에 모욕적인 댓글이 달리기 시작한 건 2017년 10월이다. “이런 애들이 꼭 밖에서는 성욕 해소하려 창녀촌 찾더라.” “페미짓으로 여자한테 칭찬받고 얼굴 벌개져서 뒤에 가서 헉헉거리면서….” “아아 여성님!!! 이러는 애들이 제일 한심하다.”

비슷한 시기 한씨는 한 대학 신문방송학과 페미니즘 소모임으로부터 인터뷰를 요청하는 e메일을 받았다. 메일은 “한국에서 ‘남성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라는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싶다”면서 “남성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면서 겪은 고충, 주변의 시선, 친구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 등과 관련해 의견을 듣고 싶다”고 했다.

대학 동아리 사칭해서 전화번호 알아내

이런 종류의 인터뷰에 몇 차레 응한 적 있는 한씨는 별다른 의심없이 메일에 기재된 연락처로 문자를 보냈다. 답장이 없었지만 인터뷰가 필요없어졌겠거니 생각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후 “○○고등학교 졸업생 페미니즘 모임 모집합니다”라는 글에 자신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는 걸 보고 신상이 ‘털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실제 한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하지만 누가 어떤 이유로 자신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아내려 했는지는 몰랐다. 얼마 뒤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3통 찍혀 있었다. 한씨와 전혀 무관한 카카오톡 메시지도 받았다. 한씨가 “잘못 연락하신 듯하니 더 이상 연락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답장을 하자 상대는 “오해해서 죄송합니다”라며 자신이 ‘안티페미협회’ 회원이라고 밝혔다. 안티페미협회는 이름 그대로 ‘안티 페미니즘’을 표방하고 있는 온라인 카페다.

한씨는 그제서야 당시 발생한 사건들의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한씨는 “생물학적 남성이 페미니즘 활동을 하고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게 못마땅했던 사람이 처음에는 모욕적인 댓글을 달다가 나중에는 대학교 동아리까지 사칭해서 내 번호를 알아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이후 경찰 조사에서 이는 모두 동일인의 소행으로 확인됐다.

상대의 괴롭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상대는 한씨의 거주지까지 알아낸 것으로 보인다. 상대는 다른 아이디를 사용해 한씨에게 “한○○씨, ○○시 △△구에 사십니까?”라고 묻는가 하면, 또 다른 대학교 페미니즘 동아리를 사칭해 “저는 ○○구 △△로 □□아파트 다동에 거주하고 있는데 원하신다면 내일 12시에 만나뵙고 싶습니다”라는 메일을 한씨에게 보냈다.

그래서 한씨는 상대에게 “말씀해주신 주소지로 제가 가겠습니다”라며 “꼭 12시에 댁 앞으로 나와주세요”라고 답장을 보냈다. 더 이상 방치했다간 자신뿐 아니라 함께 사는 부모와 누나가 피해를 입을까봐 두려워서다. 한씨는 상대를 만나 더 이상 사이버불링을 하지 말라고 당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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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페미협회의 회원이라고 주장한 ㄱ씨는 한씨의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한모씨 제공


결국 한씨는 지난해 7월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상대를 고소했다. 하지만 검찰은 ㄱ씨(24)에 대해 혐의없음(증거불충분) 처분을 내렸다. ㄱ씨가 쓴 댓글의 내용이 한씨에 대해 조롱을 하며 비아냥거렸지만 욕설과 협박으로 볼 만한 단어는 확인되지 않았다는 게 근거다. 1년 2개월 동안 ㄱ씨가 단 댓글은 100개 이상이다.

또 검찰은 ㄱ씨가 다른 사람으로 가장해 한씨의 연락처를 알아내거나 한씨의 주거지 부근에서 만나자는 내용의 메일을 보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메일 내용이 한씨가 불안감을 느낄 만한 내용이 포함돼 있지 않고 한씨가 답장을 한 사실을 봤을 때 공포감이나 불안감을 느꼈을 거라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한씨는 “만약 ‘내가 생물학적 여성이었다고 해도 검찰 결과가 그렇게 나왔을까?’라는 생각과 더불어 스토킹이나 사이버불링을 당한 피해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수사기관이 피해자의 모습을 ‘피해자다움’ 안에 가둬놓고 그 틀에서 벗어나면 피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씨의 경우, 메일 답장을 보낸 것이 피해자다움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공익 목적 위해 글 썼는데…벌금형이라니”

무혐의 처분이 나자 ㄱ씨는 반격에 나섰다. 한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다른 직업이나 인물 사칭, 혹은 아이디 여러 개를 동원해 사이버불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그 위험성에 대해 알리기 위한 글입니다”라며 “저처럼 의심 없이 다가오는 사람의 연락을 받았다가 이렇게까지 시달리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조심해주세요”라는 글에 실린 정보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한씨가 ㄱ씨의 다수 아이디를 공개한 것과 ㄱ씨가 다수 아이디를 사용하는 행위를 두고 ‘드루킹’이라고 표현한 점, 그리고 “ㄱ씨가 저런 짓을 벌이고 저를 무고로 역고소하려 했다니 기가 막히다”고 쓴 것이 사실 적시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무고로 고소할 생각이 없었다는 게 ㄱ씨 의견이다. 한씨는 벌금 70만원 약식명령을 받았다. 나아가 ㄱ씨는 벌금 70만원을 근거로 지난 6월 한씨를 상대로 5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한씨는 “페미니스트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1년 넘게 괴롭힘을 당했지만 욕설이나 협박이 없다고 해서 인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공익을 목적으로 블로그를 통해 이런 사실을 알린 저만 벌금형, 손해배상 청구소송까지 당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어 한씨는 이번 사건이 공익적인 목적에서라도 꼭 알려져야 한다고 당부했다.

“제가 받은 고통을 떠나 일이 이렇게 마무리되면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더 대담하게 여러 사람을 상대로 할 수 있고, 이런 스토킹·사이버불링이 페미니즘 운동 전체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걱정도 든다.” 벌금형에 대해 정식재판을 청구한 한씨는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간에 일단 끝까지 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하늬 기자 ha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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