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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기자칼럼]“형님, 애국이 별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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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히로뽕 수출 X나게 해가, 그 망할 놈의 원숭이 새끼들 다 뽕 쳐맞고 오줌 질질…. 애국이 별겁니까, 예? 우리가 일본을 뭐라도 이겨야 될 거 아닙니까.” 좀 거칠긴 해도, 이 대목에서 웃지 않은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경향신문

이건 영화 <범죄와의 전쟁> 중 히로뽕을 밀수출하려는 세관원 최익현의 말일 뿐이다. 현실에서 더한 일도 일제강점기 한반도와 만주, 간도 등지에서 벌어졌다. 일본도에 죽어나거나 온몸에 문신이 새겨진 위안부 사진을 본 사람이라면 영화 대사는 그냥 개그일 뿐, 오히려 너무 싱겁게 느껴질 테다. 임진왜란 때는 어땠는가. “통석의 염” 같은 모호한 표현이 아니라, 적어도 독일 수준 같은 반성과 사죄 위에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을 치유하지 않는 한 참된 ‘한·일 국교정상화’는 요원하다. 외교 수사로 아무리 꾸며봐야 공염불이다.

최근 일본의 잇단 수출규제 조치에 들불처럼 번지는 불매운동이 예사롭지 않다. 대체 어느 정도로 일본 제품이 사랑받는지 궁금했다. 한 날은 어느 고교생의 필통을 살펴봤다. 이름도 생소한 일본 볼펜이나 형광펜, 지우개까지 한 움큼이 나왔다. 3분의 2가 넘는다. 학생도 이번에야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생활 구석구석에 일제가 파고들었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좋은 ‘샤프’는 늘 일제였다. 국산은 펜 끝이 흔들리곤 해서 툭하면 얇은 심이 부러졌다. 그러나 이젠 우리 경제가 일본의 꼬붕 노릇 하던 시절이 아니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역사 문제에서 비롯됐지만, 배경에는 급성장한 한국 경제에 대한 견제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일본 전자업체 이익을 더해도 삼성전자 하나보다 못한 처지다. 일본 기술자가 없으면 고장 난 제철소를 못 돌리던 시절도 아니다. 과거 브라운관 TV 때는 소니, 파나소닉 같은 제품을 우리는 못 만들 줄 알았다. 그러나 액정화면(LCD)으로 넘어오자 삼성, LG가 뒤엎어버렸다. 현대정공 시절 미쓰비시 차를 거의 그대로 가져와 껍데기 씌워서 팔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적어도 신차 품질로는 일본 도요타, 혼다 같은 대중 브랜드는 따라잡았다.

아직 곳곳에 일본 기술력은 탄탄해 보인다. 자전거 변속기만 봐도 시마노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카본 소재는 일본 도레이가 잡고 있다. 국내 굴지 대기업에 ‘국산 카본도 만들어보라’고 했더니 돌아온 답은 “돈이 안된다”였다. 중요한 소재이지만 정작 뒤늦게 손대기에는 이익보다 비용이 더 드는 격이다. 삼성 같은 대기업이 시마노 뺨칠 변속기 하나 못 만들까. 결국 이런 건 강소기업들이 해내야 한다. 정부 지원은 물론 대·중소 협력체제를 통해 마중물을 부어야 할 때다.

무조건 반일, 극일이 현명한 해법은 아니다. 동북아 평화협력을 위해서라면 어차피 일본과도 손잡아야 한다. ‘아시아의 패권자’가 될 가능성이 큰 중국을 어떻게 견제하느냐가 한국과 일본엔 향후 큰 숙제다. 과거 1000여년 역사에서 보듯 대륙세력인 중국과 해양세력인 일본이 충돌했고, 그 완충지는 한국이었다. 청일전쟁에, 만주국의 오점까지 지닌 중국이 일본을 그냥 놔둘 리 없다. 이번 한·일 갈등의 뿌리는 대중 견제용 포석이란 해석까지 나온다. 일본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한국에 잘 보여야 할 때가 올 수도 있다.

지금 전국적으로 불타오른 반일감정은 그냥 내버려둬라. 어차피 한풀이 굿판은 1965년 억지 합의로 꿰맞춘 한·일이 치러야 할 대가다. 참된 해법은 그 뒤 자연스레 찾게 될 것이다. 그 대전제는 일본을 ‘정상국가’로 바로잡는 일이다. 징용에 끌려가 죽을 고생을 했건만 그런 기억조차 지워져가는 어르신들을 보면 한 인간으로서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

유대인은 요즘도 나치를 찾아 단죄하기 위해 이런 팻말을 붙인다고 한다. ‘Spät aber nicht zu spät(늦었지만 너무 늦진 않았다).’

전병역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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