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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경향의 눈]일본 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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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든 국가든 과거의 경험이 현재나 미래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 경험의 강도가 강할수록 잔영도 오래 남는다. 이를 이력효과라고 한다. 자석에 쇠붙이를 붙여놓았을 때 쇠붙이에 없었던 자성이 생기는 것과 같다. 자력이 강할수록 쇠붙이의 자력도 세진다. 한·일관계가 쉽게 풀리지 않는 것은 양국 간 오랫동안 축적된 과거사의 이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향신문

아베 신조 정부가 경제적 도발을 했다. 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한 외교적인 사안에 불쑥 경제적인 보복카드를 내민 것이다. 일본은 한국이 가장 아파할 부분을 노렸다. 한국경제의 주력인 반도체산업에 ‘수출규제’라는 칼을 들이댔다. 한국 기업뿐 아니라 일본 기업도 상처를 입는 무리한 조치다.

이를 두고 일본의 우익단체인 ‘일본회의’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 단체에는 아베 총리를 비롯해 일본 의원의 40%가 가입했다고 한다. 아베 총리는 창립회원이며 내각의 80% 이상이 이 단체 출신이라는 말도 있다. 극우적인 발언을 일삼는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 아소 다로 부총리도 멤버이다. 이 단체는 천황제 국가의 복원을 꿈꾸고, 2차 대전 도발을 경제 봉쇄에 저항한 자위적 전쟁으로 주장한다.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실현과 전쟁 가능한 국가로의 일본 헌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일본회의에 대한 관심은 아베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군사적 우경화는 오래전에 예견됐다. 이미 30년 전 폴 케네디는 일본 경제력의 폭발적인 성장과 군사력의 과소성장이라는 불균형 상태가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강대국의 흥망>에서 일본이 ‘상업적 전문지식과 재정적인 풍요만 가지고 국제적 권력정치라는 무질서에서 버틸 수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월등한 경제력을 가진 국가들이 그랬듯이 일본도 군사력 증강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할 걸로 본 것이다. 일본이 소규모 ‘자위대’만 가진 ‘단순한 무역국가’로 남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이는 패전국가로서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전방위 평화외교의 중단을 의미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면서 웃고 넘기지 않고 군사분야에서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는 주변국의 반발을 일으킬 것이 자명하다. 그래서 폴 케네디는 군사대국으로의 길을 ‘일본의 딜레마’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의 선택 시기는 코앞의 미래로 보였다.

그러나 일본의 성장 엔진이 멈추면서 군사대국의 야심도 잠시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일본은 1985년 미국과의 플라자 합의 이후 경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엔화가치 절상으로 일본 제품의 경쟁력은 떨어졌다. 일본은 엔고가 독배인 줄 모르고 즐겼다. 1989년을 정점으로 일본 경제의 거품은 한꺼번에 꺼졌다. 부동산과 증권시장의 참담한 하락을 눈으로 지켜봐야 했다. 일본인들은 쇼와(昭和·1926~1989)시대의 마지막을 ‘아름다웠던 시절’이라 부른다. 거품이었지만 한때 풍요했던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다. 메이지 시대 이후 가장 좋았던 때였다는 말도 한다. 축제는 끝났고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보냈다. 지우고 싶도록 암울한 헤이세이(平成·1989~2019년)시대다.

아베가 2012년 총리에 올랐다. 금융위기 이후 서서히 경제가 살아나면서 야욕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일본을 움직이는 주체는 소수의 양심세력이 아니라 주류인 우익세력이다. 아베는 일본 우익의 선봉이다. 아베는 레이와(令和·2019~)시대의 출범을 과거와의 단절, 새로운 시대의 출발로 삼기로 작정했다. 아베의 생각은 분명하다. 전쟁 가해자였던 과거 흑역사 청산, 전쟁할 수 있는 보통국가화, 궁극적으로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춘 강대국의 완성이다. 아베는 레이와시대가 시작하자마자 한·일 간 청구권협정 문제를 꺼내들었다. 수치스러운 과거를 땅에 묻는 것이 첫번째로 정리해야 할 막중한 과제인 것이다. 해결방식이 무모한 것도 그 같은 배경에 기인한다.

양국이 대치하고 있다. 일단 꺼낸 칼을 쓰지도 않고 도로 칼집에 넣을 수도 없는 형국이다. 양국의 입장이 천양지차인 만큼 갈등은 장기화할 가능성이 높다. 한일청구권 문제는 미래에 벌어질 양국 갈등의 시작일 뿐이다. 독도문제, 일본 평화헌법 개정 등 불씨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장기 극일 플랜을 짜야 한다. 흥분 속에 내부 총질은 필패의 길이다. 힘을 키우는 데도 시간이 부족하다. 자신감을 갖되 자만은 금물이다.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허황된 꿈을 좇는다면 한국의 미래는 기약할 수 없다. 미래는 생존을 위한 고단한 여정이다. 냉정하고 현실적인 방책을 고민해야 한다. 국제정치는 꿈이 아닌 힘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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