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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3 (수)

‘안중근 의거’ 도운 최재형 선생, 순국 99년 만에 ‘항일 상징’으로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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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우수리스크에 기념관 열고 ‘기념비 제막식’도

군납사업하며 독립운동 지원·학교 설립 주도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1920년 일본군에 처형…추모위 “일 경제침략 상황서 애국 되새길 계기”

경향신문

최재형 선생(위 사진)의 손자 최발렌틴이 지난 12일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기념관에서 열린 기념비 제막식에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다. 홍진수 기자·최재형 순국100주년추모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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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1860~1920)이 99년 만에 항일의 상징으로 부활하고 있다. 이역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 일본군 총탄에 순국한 그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최근 활발하게 이뤄지면서다. 특히 대법원의 강제징용공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한·일 갈등이 극점으로 치닫는 상황과 맞물려 주목받고 있다.

우선 지난 3월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최재형의 고택(옛집)이 기념관으로 조성돼 문을 열었다. 2018년 2월 발간된 평전 <페치카 최재형>(도서출판 선인)은 2쇄를 올 초 찍었다. 이달 말에는 최재형의 딸 올가와 아들 발렌틴이 쓴 회고록 <나의 아버지 최재형>(도서출판 상상)이 한국어로 번역돼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12일 최재형 기념관에서 열린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은 ‘항일과 필승을 다짐하는 자리’가 됐다. ‘최재형 순국 100주년 추모위원회’(추모위) 공동대표인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은 축사에서 “최재형 선생이 부활하는 오늘날 일본은 경제침략을 자행하고 있다”며 “100년 전 우리는 힘이 없어 당했지만 지금의 우리는 다르다. 최재형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셨고 독립운동가를 지원하셨던 이곳 연해주에서 우리는 한·일 경제전쟁에서 꼭 이기겠다는 다짐을 함께한다”고 말했다. 오성환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총영사 역시 “이런 위기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100년 전 애국지사들이 그랬듯이 애국심과 도전정신을 새롭게 해주는 계기가 됐다”며 “지금의 대한민국은 100년 전의 대한민국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추모위는 최재형 순국 10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그의 후손들과 함께 순국 100주년 기념식과 추모음악회, 국제 심포지엄, 다큐멘터리·출판 기념회, 사진전 등 다양한 사업을 벌일 예정이다.

10여년 전만 해도 최재형의 삶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가 순국하기 전까지 살았던 우수리스크 보로다르스카야 38번지에는 표지판조차 없었다. 한·소 수교(1990년) 이후 러시아 지역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최재형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2010년 한국과 러시아 정부가 한·러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최재형의 집’이라는 문패를 달았다. 최재형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다. 그러나 집주인은 따로 있었기에 관광객은 물론 학자들도 그 집으로 들어가기 어려웠다. 2014년 우수리스크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가 최재형의 집을 매입해 기념관을 준비하면서 그의 흔적을 직접 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최재형은 1860년 8월15일 함경북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1869년 함경도 일대에 홍수가 나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자 그의 일가는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갔다. 조선보다는 삶이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

당시 연해주 한인들은 자녀들을 러시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최재형은 러시아 학교를 택했다. 러시아 학교에 입학한 첫 한국인이었다. 조국을 떠났지만 여전히 가난했다. 수원대 박환 교수가 쓴 <페치카 최재형>에는 ‘한겨울에도 양말과 신이 없어 짚단을 가지고 눈위를 걸어다니다가 잠시 그 짚단을 펴고 발을 녹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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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러시아 우수리스크 최재형 기념관에서 열린 최재형 기념비 제막식에서 김재윤 최재형추모위원회 상임위원장, 정병천 국가보훈처 현충시설과장, 오성환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총영사, 안민석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소강석 한민족평화나눔재단 이사장, 최재형 선생의 손자 최발렌틴, 문영숙 최재형기념사업회 이사장, 이 블라디미르 우수리스크 시의원(왼쪽부터)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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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형은 학교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한 뒤 12살에 집을 나왔다. 한 러시아 상선에 일자리를 구했는데 선장 부부가 최재형을 자식처럼 거둬줬다. 인텔리였던 선장의 아내는 최재형에게 러시아어와 유럽 문화를 가르쳤다. 최재형은 선장을 따라 6년 동안 배를 타고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세계 곳곳을 항해했다.

최재형은 17살이 되자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했다. 이후 군납사업을 하며 부를 쌓았고, 이렇게 번 돈을 항일 독립운동과 동포 지원에 사용했다. 연해주에만 학교 30여개를 세웠다. ‘페치카’(러시아어로 난로)란 별명은 이 때문에 생겼다.

최근에는 그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 ‘배후’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최재형은 1908년에는 의병 유격대인 동의회를 조직해 안중근과 함께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사살할 때 사용한 브라우닝 권총을 구해준 사람도 최재형이었다고 한다.

딸 올가는 회고록에 “우리가 살고 있던 노보키예프스크에 어느 때인가 안응칠(안중근 의사의 어릴 때 이름)이 살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안인사라고 불렀다. 그는 의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벽에 3명의 인물을 그렸고 그들을 향해 사격연습을 했다. (…) 그의 아이들과 두 명의 아내가 남게 되었다. 엄마는 안응칠의 남은 식구들을 잘 대접하려고 노력했다”고 썼다.

최재형은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한 일본군이 저지른 ‘신한촌 참변’ 때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처형됐다. 아무도 그의 시신을 찾지 못했고 묘도 쓸 수 없었다. 1962년 한국 정부가 건국훈장 독립장(3급)을 추서했지만, 곧 다시 잊혀졌다.

제막식에는 한국에서 ‘역사탐방’을 온 일반인 참석자들도 있었다. 친자매인 서혜란씨(31)와 희연씨(29)는 오로지 최재형 기념관을 보기 위해 우수리스크에 왔다고 했다. 그 길에 기념비 제막식까지 함께하는 행운을 얻었다. 희연씨는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그 뒤에 최재형이란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며 “예전에는 이곳이 아무것도 없는 땅이었을 텐데, 맨몸으로 와 마을을 일구고 같은 민족을 이끌었다는 것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언니 혜란씨는 “제막식에서 (최재형 선생의 손자인) 최 발렌틴 선생(82)이 러시아 국가는 따라부르시던데, 애국가는 잘 못하시는 것이 참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기념관 관계자 요청으로 ‘인증샷’용으로 서울에서 가져온 태극기도 기증하고 떠났다.

최재형은 실상 러시아에서도 한동안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제막식에서 만난 손자 최 발렌틴은 “할아버지 성함을 함부로 말할 수가 없고 말하면 안되는 시절이 있었다”며 “자녀들도 피해를 많이 받았다”고 떠올렸다. 최재형 사후 그의 가족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됐다.

최 발렌틴은 최근 10년간 할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정부 덕분에 최재형 선생이 유명 인사가 됐다. 많이 노력해준 분들에게, 대한민국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우수리스크(러시아) | 홍진수 기자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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