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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의 世說新語] [532] 문슬침서 (捫虱枕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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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왕안석(王安石)은 두보(杜甫)의 시 중 '주렴 걷자 잠자던 백로가 깨고, 환약을 빚는데 꾀꼬리 우네(鉤簾宿鷺起, 丸藥流鶯囀)'란 구절을 아껴 뜻이 고상하고 묘해 5언시의 모범이 된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다가 스스로 '청산에서 이 잡으며 앉아 있다가 꾀꼬리 울음소리에 책 베고 자네(靑山捫虱坐, 黃鳥枕書眠)'란 구절을 얻고는 자신의 시도 두보만 못지않다며 자부했다고 한다. 섭몽득(葉夢得)의 '석림시화(石林詩話)'에 나온다.

방 안 공기가 갑갑해서 주렴을 걷었다. 마당가 방죽에서 외다리로 졸던 백로가 그 소리에 놀라 깨서 저편으로 날아간다. 미안하다. 약 가루를 반죽해 손가락 끝으로 굴려 환약을 짓는데, 그 리듬에 맞춰서 꾀꼬리가 운다. 손가락 끝에서 꾀꼬리 울음이 데굴데굴 굴러간다[囀]. 간지럽다. 시격은 두보가 두어 수 위다.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시에 이렇게 썼다. '이나 잡지 어이해 세상일 얘기하리. 산 이야기 물 이야기 또한 할 말 많다네(捫虱何須談世事, 談山談水亦多談).' 그의 벗 대곡(大谷) 성운(成運·1497~1579)이 이렇게 받았다. '사람 만나 산속 일도 얘기하기 싫으니, 산의 일도 말만 하면 또한 남과 어긋나네(逢人不喜談山事, 山事談來亦忤人).'

조식은 답답한 세상일 얘기하다 더 답답해지지 말고, 그 시간에 이나 잡든지 그도 아니면 산수 이야기나 하라고 말했다. 성운은 산수 이야기조차도 걸핏하면 말꼬리를 잡아 기분만 상하게 되니, 아예 아무 말도 안 하겠다고 썼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 이 이야기를 적고 나서 "말에 담긴 뜻이 성운이 더욱 높다"고 평했다.

왕안석과 조식의 시에 나오는 '문슬(捫虱)'은 이를 잡는다는 말이다. 전진(前秦)의 소년 왕맹(王猛)이 대장군 환온(桓溫)을 찾아가 알현하고, 천하 일을 유창하게 담론하는 한편으로 이를 잡으며 여유만만하고 거침없는 태도를 보였다는 데서 처음 나왔다.

세상이 온통 무더위 찜통 속이다. 그래도 입추가 지나고 나서는 교앙(驕昂)하던 매미 울음소리의 기세가 꺾였다. 피곤한 세상일 잠시 잊고 바람 드는 마루에서 태고의 적막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은 어떨까?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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