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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김창균 칼럼] “文 대응에 아베 패망” 판타지로 총선 치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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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제로 日 지자체 한숨… 日製 불매운동에 아베 당혹”

정권코드 언론 덮는 뉴스들 보복 찬성 60% 실상과 거리

아베 궁지 몰았다 과장해서 총선 표만 얻으면 그만인가

조선일보

김창균 논설주간


1960~70년대 한국 선수가 출전하는 복싱 타이틀 매치는 국가적 행사였다. 온 국민이 라디오 중계를 들으며 응원했다. 2002년 월드컵 열기 못지않았다. 중계 내용은 늘 한국 선수 우세였는데, 심판 3명의 판정은 1대2, 심지어 0대3 패배로 나오기도 했다. 중계진은 “말도 안 되는 편파 판정”이라고 흥분했고 국민은 분노했다. 억울하게 챔피언 벨트를 뺏겼다는 그 경기를 2, 3일이 지나면 TV 녹화 중계로 시청할 수 있었다. 대개의 경우 상대 선수 유효 펀치가 더 많아 보였다. 편파적인 건 판정이 아니라 ‘애국적’ 중계였다.

50여 년 전 그 '애국적' 중계를 요즘 다시 듣는다. 저녁 TV 뉴스를 켜면 한국 관광객 발길이 끊긴 일본 지방자치단체 소식이 곳곳에서 쏟아진다. 필자가 우연히 본 것만 후쿠오카, 대마도, 오사카, 니가타 등 네댓 곳쯤 된다. 현지 주민들은 "한국 분들이 안 오셔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쉰다. 아베 총리를 원망하는 분위기다. 인터넷엔 불매운동으로 일본 제품 매출이 곤두박질친다는 뉴스가 전진 배치된다. "아베 정권이 한국 정서를 잘못 건드렸다"는 일본 보도를 소개하는 것도 빠지지 않는 메뉴다. 이런 '애국적' 보도만 접하다 보면 당혹감에 휩싸여 있을 아베 정권의 모습이 그려진다. 정말 그럴까.

지난주 일본 TBS방송 여론조사에서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 배제 조치'에 대한 찬성이 64%였다. 반대 18%의 3배를 넘는다. 한 달 전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에 대한 찬성 58%보다 상승한 수치다.

청와대나 여당은 수출 규제로 한국 기업 피해는 '한 줌'밖에 안 되고 한국 거래선을 잃게 된 일본 기업이 더 타격을 입는 것처럼 말한다. 우리 해당 업체 설명은 달랐다. "우리 회사 수십조 매출을 위해 일본 부품 소재 1000억어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이 1원어치 피해를 감수하면 우리에게 100원이 넘는 타격을 줄 수 있는 구조다. 칼자루를 쥔 게 어느 쪽이겠나." 여행 자제에 대한 일본 반응도 우리 언론 보도와는 온도차가 난다. "한국 관광객은 한국 비행기를 타고 와서 한국 가이드를 따라 한국인이 운영하는 숙박업소와 식당을 주로 들른다. 피해를 보는 건 한국인이나 재일교포 아니냐"는 것이다.

일본 수출 규제와 한국 불매운동으로 일본도 물론 타격을 입는다. 그러나 아베 정권이 괴로워서 압박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동북아 국가 GDP 규모를 보면 한국이 1조5000억달러, 중국은 그 8배인 12조2000억달러, 일본은 3배 남짓인 4조8000억달러다. 우리도 중국의 사드 보복 조치를 이겨냈는데, 일본이 한국 불매운동을 못 견디겠나.

일본 수출 규제를 비판하는 국제 여론에 희망을 거는 분위기도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아베보다 훨씬 야만적으로 무역 보복을 하고 있다. 아베는 그걸 믿고 흉내를 낸 것이다. 국제정치 무대는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정글이다. 트럼프·아베 커플의 횡포는 대한민국 촛불 민심으로 제압되지 않는다.

집권 세력이 이런 물정을 모를 정도로 국제정치 문맹일 리는 없다. '일본에 대한 강경 대응이 총선에 도움이 된다'는 민주당 내부 보고서가 속내일 것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8개월만 일본 여행 자제하면 일본은 항복한다'는 포스터가 여권 전략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내년 4월 15일 총선에서 토착왜구들을 정치권에서 몰아내고 나면 그때부터 도쿄올림픽이 핵심 이슈로 떠오른다. 남북한이 동시에 올림픽 보이콧을 할까 두려워 일본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는 거다.

집권당 회의에선 일본 패망론까지 등장했다. 일본 경제는 장기 침체와 재정적자로 원래 허약 체질인데 무리한 수출 규제로 결정타를 맞게 된다고 한다. 2차 대전 때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 코털을 건드렸던 일본이 이번엔 한국을 자극했다가 두 번째 패망을 맞게 된다는 시나리오다.

한국을 얕본 대가로 일본이 패망한다. 일본 총리가 백기를 들고 용서를 빈다. 상상만 해도 친문 지지층 상당수는 쾌감을 느낀다. 그런 판타지를 팔아서 내년 총선에서 이긴다는 것이 문 정권과 집권당의 전략이다. 정권 지지율을 떠받쳐 왔던 김정은이 문 대통령을 버려서 난감했는데 그 빈자리를 반(反)아베 정서가 훌륭하게 메꿔주고 있다. 북쪽에 있는 줄 알았던 문 대통령의 귀인이 바다 건너 동쪽에서 나타난 격이다.

일본의 실제 상황이 어떤지, 뒷수습이 되는 흐름인지는 정권 관심사가 아니다. 문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일본이 궁지에 몰린 것처럼 국민이 믿게 만들면 된다. 정권 코드 언론들이 애국적 편파 보도를 쏟아내는 이유다. 이런 야바위에 국민이 8개월 동안이나 속아줄지가 변수다.

[김창균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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