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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5 (금)

눈물이 계속 나도 파도에 씻으면 그만, 숨비소리 턱에 차도 악착같이 살아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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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문화의 고갱이를 찾아…해녀 체험 여행

경향신문

최근 제주에는 해녀들의 삶과 문화를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는 여행 프로그램이 늘고 있다. 사진은 해녀들의 신산한 삶을 다룬 연극 <어멍이 해녀>의 한 장면. 해녀들이 직접 전하는 이야기 속엔 척박한 섬에서 일궈온 억척스러운 인생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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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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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녀들과 청년 예술인들

공연과 식사 제공하는 ‘다이닝쇼’

“전복 발견하면 없던 숨도 생겨

재수 나쁘면 그놈이 날 잡는 것”


#해녀의 테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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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들이 의지하는 필수 도구

테왁 만들기 체험할 수 있는 곳

해녀 대부분 수영 할 줄 몰라

살기 위해 물과 싸우는 것


해녀는 제주 문화의 고갱이다. 천혜의 바다를 품은 제주는 우리 역사에서 고난과 억압의 땅이기도 했다. 그 안에서 일궈온 억척스러운 삶을 상징하는 게 바로 제주 해녀다. 그런 보편성과 특수성을 인정받아 제주 해녀문화는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고 2017년엔 국가무형문화재(132호)로도 이름을 올렸다.

‘살아 있는 유산’ 해녀는 사라져가는 유산이기도 하다. 한때 2만명이 넘었던 제주 해녀는 4000여명까지 줄었다. 그중 절반 이상이 70대 이상 고령 해녀다. 다행히 해녀들과 직접 부대끼며 그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여행 기회가 최근 늘고 있다. 숙박공유업체 ‘에어비앤비’의 트립 프로그램을 이용해 제주 해녀들을 만나봤다. 직접 채취한 해산물로 만든 식사를 대접받고, 힘겹게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동안 제주라는 섬 속으로 한 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 “흐르는 눈물도 파도에 씻으면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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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달리 해녀들과 청년 예술인들이 함께 만든 ‘해녀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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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의 부엌’은 구좌읍 종달리 어촌계 해녀와 청년 예술인이 함께 운영하는 회사다. 해녀들의 사연이 담긴 공연과 식사를 함께 제공하는 ‘다이닝 쇼’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아이디어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한 김하원 대표(28)가 냈다. 종달리 출신인 김 대표는 부모가 어업에 종사하고 고모와 할머니가 해녀다. 가족과 고향을 도울 수 있는 일을 찾다 전공을 살려 공연을 기획했다. 방치된 활어 위판장 건물을 개조해 공연장으로 꾸미고 올해 3월부터 관객을 받았다. 금·토·일 사흘만 점심·저녁 두 차례 공연하는데 4만원이 넘는 가격에도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다.

첫 순서는 <어멍이 해녀>라는 연극이었다. ‘잠녀 노래’라고도 불리는 제주 민요 ‘이어도 사나’ 가락과 함께 극이 시작했다. 배 타고 바다에 나갔던 남편을 잃은 해녀 금덕이 망연자실하는 동안 친한 동료 미자가 위로하며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에 가슴이 아렸다.

“애비 없이 새끼 키우는 거 겁나. 바다에 들어가서 차라리 안 나오고 싶어.” “너만 서방 없냐. 우리 어멍도, 옆집 순이삼촌도 다 없어. 아무리 바다가 밉고 싫어도 자식들 키워주고 먹여주고 입혀주는 게 결국 바다여. 기운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들어가야지. 숨비소리 ‘회애이’ 뱉고 나면 가슴에 맺힌 게 확 풀려.” “계속 눈물이 난다고.” “파도에 씻으면 그만이지.” “가슴이 탁 막혀.” “흐르는 물에 씻으면 그만이지. 자식들 생각하며 악착같이 살아보자!”

신산한 삶을 견뎌낸 말년의 금덕은 딸에게 묻는다. “나 이만하면 그래도 잘 살았지?” 그 질문에 딸이 직접 답하며 무대로 걸어나오는 순간 극은 현실로 이어졌다. “고생한 엄마 생각하면 눈물밖에 안 나온다”는 종달리 최고령 현역 해녀 권영희씨(87)가 관객에게 인사하며 그의 인생 역정이 담긴 극은 막을 내렸다.

■ 횟집에선 맛볼 수 없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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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소라의 특징을 설명하는 해녀 고봉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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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서는 해녀가 전하는 해산물 이야기. 물질 경력 50년 해녀 고봉순씨(67)가 “봉순이 나감서!” 큰 소리로 외치며 등장하자 객석에 웃음이 터졌다. 고씨는 해녀들이 흔히 잡는 뿔소라를 꺼내 들고 껍데기 깨는 요령과 암수 구별법을 설명했다. 도깨비방망이처럼 생긴 뿔소라를 먹으면 액땜이 된다는 해녀들 속설도 전했다. 시커멓고 울퉁불퉁한 생김새의 군소는 귀한 해산물이라 팔지 않고 집에 가져가 한꺼번에 10~20마리씩 삶아 먹는다고 했다. 돈 주고는 맛보기 힘들다는 군소 요리의 맛을 그는 ‘베지근하다’는 제주말로 표현했다. 대체 무슨 맛일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이어서 해녀들이 직접 준비한 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갈치조림, 삼치전에 톳밥과 성게미역국 등 성찬이 펼쳐졌다. 제주에서 귀한 손님 모시는 잔칫날에 꼭 준비한다는 뿔소라산적도 빠지지 않았다. 해녀들이 특히 좋아한다는 우뭇가사리무침도 별미였다.

식사 후엔 권영희·고봉순씨가 다시 나와 관객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물속에서 숨을 어떻게 참냐’는 질문에 권씨는 “밖으로 나오려다가도 전복을 발견하면 없던 숨이 생긴다”고 했다. “재수가 좋으면 그 전복을 내가 잡고, 재수가 나쁘면 그놈이 나를 잡는 것”이라는 말에 좌중이 숙연해졌다. 고씨는 ‘딸이나 손녀가 해녀를 한다면 어떡하느냐’는 질문에 “요즘 사람들은 힘들어서 못한다”면서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해녀를 하겠다”고 했다. 젊었을 땐 사람들에게 천대받는 해녀라는 걸 숨기고 살았다는 그는 반대로 해녀라는 이유로 박수받는 요즘 삶의 보람을 느끼고 바다에 나갈 때도 부쩍 힘이 난다고 했다.

■ 해녀들의 목숨줄, 유일한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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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해녀박물관의 해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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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좌읍 김녕리 ‘해녀의 테왁’은 해녀가 물질에 사용하는 필수 도구인 테왁 만들기 체험을 진행하는 예비 사회적기업이다. 수익금 일부를 김녕리 고령 해녀들의 일자리 소득으로 지원한다. 한 번에 40명이 동시 참여할 수 있는 체험장을 갖추고 있어 단체로도 많이 찾는 곳이다.

시작 전에 5분 남짓한 동영상을 먼저 감상하며 일 나가는 해녀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테왁이 뭐냐’는 물음에 해녀들의 답은 한결같았다. “테왁? 생명줄이지.” “테왁 없이 어떻게 물질을 해. 테왁 없으면 죽은 목숨이야.”

테왁은 부력을 이용한 해녀의 작업도구다. 제주 바다에 흔히 떠 있는 주황빛 공 모양 물체가 바로 테왁이다. 망망대해에서 해녀들은 테왁에 의지해 바다밭 사이를 이동하고, 잠수 후엔 테왁을 부여잡고 물 위에서 숨을 돌린다. 테왁에 매단 그물 ‘망사리’에는 물속에서 채취한 해초며 소라, 전복, 문어 등을 담는다. 그러니 해녀들에게 테왁은 목숨줄이자 돈이고,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섬 같은 존재다.

과거엔 박으로 테왁을 만들었다고 한다. 단단하게 여문 박의 속을 긁어내고 촛농으로 구멍을 막은 뒤 그걸 붙들고 바다로 나갔다. 망사리는 억새를 새끼 꼬듯 꼬아서 만들었다. 요즘은 바다에 버려진 스티로폼 재질의 부표를 주워다 자기 몸에 맞게 가공해 테왁을 만든다. 일종의 업사이클링인 셈이다. 작업하는 해녀가 있다는 걸 주위에서 알아보기 쉽도록 테왁에 감싸는 주황색 천은 도청에서 제공한다.

■ 깊은 곳에서 토해낸 그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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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테왁을 만들며 물질을 간접 체험하는 ‘해녀의 테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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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의 테왁을 운영하는 조문숙 팀장(53)은 어머니도, 시어머니도 모두 해녀다. 그런 그도 해녀가 어떻게 물질을 하는지, 테왁이 해녀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지 이 일을 하기 전엔 잘 몰랐다고 한다. 관광객과 비슷한 비중으로 찾아오는 제주도민들도 설명을 듣고 체험을 하고 나면 “처음 듣는 얘기”라거나 “해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돼서 좋다”는 반응이 많단다.

조 팀장의 시어머니인 60년 경력의 해녀 김화자씨(77)의 안내에 따라 미니 테왁을 만들어봤다. 나일론 줄에 동그란 틀을 매달아 망사리 입구를 만들고 촘촘히 바느질을 해 테왁을 연결했다. 망사리에는 장식용으로 전복과 소라 껍데기를 여러 개 집어넣었다. 김씨가 “망사리 끝부분을 제대로 여미지 않으면 애써 잡은 해산물이 다 빠져나간다”고 주의를 주는데, 안타까워하는 표정만 봐도 본인 경험에서 나온 조언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휘파람이나 바람 소리 같다고, 흔히 낭만적으로 비유하는 숨비소리(해녀들이 수면 위로 솟구치며 숨을 내뱉는 소리)를 그는 “숨 넘어가는 소리”라고 했다. 목이 바짝 마르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토해내는 비명 같은 소리가 숨비소리라는 것이다. 그를 포함해 대부분 해녀들이 수영을 할 줄 모른다는 말도 충격적이었다. 바닷속을 제 집같이 드나드는 것처럼 보이는 해녀들도 실은 살아남기 위해 늘 물과 싸우고 있다는 것, 어쩌면 당연한 그 사실 앞에서 경외와 위안의 감정이 교차했다.

제주 | 글·사진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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