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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4 (목)

일상 속 마법을 포착한 사진가…`시대의 눈` 브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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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예술가의 사회-31]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사진작가·1908~2004)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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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무덤 앞에서

다큐멘터리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 주인공은 88세 영화감독 바르다와 33세 사진가 제이알이다. 할머니와 손자뻘인 두 예술가가 프랑스 곳곳을 누빈다. 두 사람의 여정은 따스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쇠락한 폐광촌을 찾아 그곳 주민을 만난다. 시골 마을 우체부, 농부, 항만 노동자의 부인들도 만난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인생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얼굴을 카메라에 담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땀 흘리는 노동자의 '한순간'이 영화라는 예술에 담긴다.

아녜스 바르다는 장뤼크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등과 함께 프랑스 영화 역사를 세운 감독이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구순을 앞둔 거장의 성찰이 담긴 작품이다. 제이알이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죽음이 두려우세요?" 바르다는 초연히 대답한다. "아니, 많이 생각해 보는데 두렵진 않은 거 같아. 난 기다려지기까지 해." "왜요?" "다 끝날 테니까." 바르다는 죽음마저 기꺼이 맞이할 용기를 보여준다.

두 사람이 죽음을 주제로 대화를 나눈 장소는 한 묘지 앞이었다. 묘비명엔 이렇게 적혀 있다. '사진은 영원을 밝혀준 그 순간을 영원히 포획하는 단두대.' 이곳에 묻힌 인물도 바르다와 제이알처럼 사소한 삶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위대함을 건져 올렸다. 그는 '결정적 순간'을 포획하려 전 세계를 뛰어다닌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다.

◆순간에 깃든 마법

비슷한 얼굴로 찾아오는 일상 속에서도 종종 어떤 '순간'은 섬광처럼 잔상을 남긴다. 한낮 한강을 가로지르는 지하철을 타본 사람이라면 휴대폰에서 눈을 떼고 햇살의 질감을 느껴봤을 것이다.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열차 안으로 쏟아지는 햇살엔 왠지 모를 평화가 깃들어 있다. 지하철이 한강 위를 달리는 1분 남짓한 시간 누군가의 마음은 평온함으로 물든다. 하루 1440분의 1에 불과한 이 짧은 순간은 그날의 하이라이트가 되기도 한다.

브레송은 '순간의 마법'을 찾아다닌 사진가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생 라자르역 뒤'(1932)다. 유명인이 등장하지도 않고, 중요한 사건을 기록한 사진도 아니다. 그저 물 고인 웅덩이 위로 폴짝 뛰어드는 중인 남자를 찍은 사진이다. 브레송이 셔터를 누른 직후 남자는 물웅덩이에 그대로 빠졌을 테고, 축축해진 바짓단을 툭툭 털며 귀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진 속에서만큼은 이 남자는 하늘을 나는 듯하다. 물 위를 걷는 듯한 신비함도 느껴진다. 남자의 역동적인 동작은 수면 위에 반사된 그의 그림자와 데칼코마니를 이룬다. 저 멀리 벽에는 발레 공연 포스터가 붙어 있다. 포스터엔 도약 중인 무용수가 그려져 있는데, 물 위의 남자와 동작이 비슷하다. 우연이라는 마법, 리듬감, 기하학적 미감이 한데 뒤섞인 이 작품은 기록물에 불과했던 사진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놨다.

◆"만물에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

프랑스 시인 랭보는 20대 중반 이후 다시는 시를 쓰지 않았다. 37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다 떠난 천재 시인은 마지막 10년 대부분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미지의 세계에서 모험하듯 여생을 보냈다.

브레송은 랭보의 시와 삶을 동경했다. 그도 랭보처럼 아프리카로 떠난다. 가방엔 중고 카메라 한 대가 있었다. 1931년이었고, 브레송 나이는 23세였다. 이 여행은 브레송의 삶을 바꿨다. 그는 1년간 아프리카를 떠돌며 카메라로 생경한 풍경을 담았다. 화가를 꿈꿨던 브레송은 사진의 매력에 푹 빠졌다. 그는 1932년 프랑스로 돌아와 평생 동반자가 될 '라이카 카메라'를 샀다. 본격적으로 사진가의 길에 뛰어든다.

브레송은 파리의 살롱을 드나들었다. 그곳은 초현실주의 예술가 소굴이었다. 브레송이 초현실주의로부터 배운 건 일상을 다르게 보는 시선이었다. 브레송은 "만물에는 결정적 순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단조로운 삶 속에서 가끔 찾아오는 '결정적 순간'을 포획하려 했다. 눈 깜짝할 새 사라지고 마는 '찰나'를 붙잡기 위해 언제나 카메라를 손에 쥐고 다녔다.

브레송은 연출 사진을 거부했다. 그에게 필요한 건 카메라, 기본 렌즈, 자연광 그리고 인내심뿐이었다. 플래시를 터뜨리지 않았고, 사진을 인화할 때 트리밍도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이 유명해지는 것조차 꺼렸다. 얼굴이 알려지면 자연스러운 사진을 찍는 데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 '생 라자르역 뒤'는 우연과 끈기가 빚은 작품이다. 브레송은 카메라를 들고 묵묵히 기다렸다. 한 남자가 웅덩이 위로 '폴짝' 뛰는 순간 '찰칵' 셔터를 눌렀다. 빛과 그림자, 인간의 육체, 배경과 피사체, 사진을 찍는 작가의 호흡 등 지금 이 순간 모든 요소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찰나를 붙잡은 것이다. 브레송은 평범한 삶에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예술가 눈으로 포착한 일상엔 환상의 빛이 드리워 있다. 그는 지하철에 쏟아지는 햇살 속 평화처럼 감각의 문을 활짝 열어야만 바라볼 수 있는 마법을 수집했다.

◆로버트 카파와 '매그넘'을 만들다

오늘날 브레송에게 붙어 있는 꼬리표는 '초현실주의 사진가'가 아니다. 그는 위대한 저널리스트로 평가받는다. 브레송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굵직한 사건을 촬영했다. 순수 예술로서 사진을 시작한 브레송이 사회적 책무를 안고 셔터를 누르게 한 건 2차 세계대전이다. 프랑스군 종군 사진기자로 징집된 브레송은 곧 독일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된다. 그는 세 번의 시도 끝에 탈출했다. 포로 생활 3년간 당연히 사진을 찍지 못했다. 대신 두 눈으로 비극의 현장을 찍었고, 마음속에 현상했다. 전쟁 이후 브레송의 카메라는 역사적 현장으로 향한다.

전쟁과 함께 브레송을 바꾼 건 로버트 카파다. 그는 스페인 내전, 중일전쟁,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죽음이 일상인 곳을 찾아다니며 셔터를 누른 종군 사진가다. 카파가 스페인 내전에서 찍은 '쓰러지는 병사'는 보도 사진계의 신화다. 카파는 초현실주의 예술가에 가까웠던 브레송을 포토 저널리즘 세계로 안내했다. 브레송과 카파는 또 다른 종군 사진가 데이비드 시모어, 조지 로저와 함께 1947년 '매그넘'을 창립했다. '매그넘'은 보도 사진기자 권익 보호를 위한 조합으로 첫발을 뗐다. 동시에 전 세계 언론사에 사진을 제공하는 통신사 역할을 맡았다.

◆베를린장벽 앞의 아이들

브레송은 '매그넘' 타이틀을 달고 1948년 인도 뉴델리를 찾았다. 거기엔 간디가 있었다. 브레송은 간디를 취재하고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한 시간 후 간디는 암살당했다. 브레송은 계획에 없었던 간디 장례식까지 사진으로 남겼다. 이 사건으로 '매그넘' 위상은 단번에 치솟았다. 브레송이란 이름도 멀리 퍼져나갔다. 그에게 일감이 몰려들었다. 온 세상이 브레송의 스튜디오가 된 셈이다.

저널리스트 사진가로 변신했지만 '결정적 순간'을 찾아내는 브레송의 감각은 여전했다. 그는 사건의 표면만 전하는 역할에 머물지 않았다. 간디 장례식을 촬영한 브레송은 곧장 중국으로 갔다. 그는 장제스의 국민당이 몰락하고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집권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중국의 주인이 바뀌는 거센 파도 한가운데서 브레송이 찍은 건 느긋하게 식사 중인 시민이었다. 브레송은 1962년 독일을 찾았다.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직후였다. 브레송은 한 나라를 절반으로 가른 차가운 장벽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찍었다.

브레송은 어떤 격변의 현장에 있더라도 그 안에 있는 일상의 의미를 물었다. 세상이 엎어지는 와중 꾸역꾸역 밥을 먹는 사람, 우울한 공기로 가득한 도시에서 까르르 뛰어노는 아이들. 브레송은 거기에 삶의 진실이 담겨 있다고 믿었다.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1964년 브레송은 자신이 만든 '매그넘'과 결별한다. 당시 브레송은 '매그넘' 공동 창립자였던 동료 셋 중 두 명을 잃은 상태였다. 1954년 로버트 카파는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 중 지뢰를 밟고 사망했다. 마지막까지 그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1956년 수에즈 전쟁 현장에 있었던 데이비드 시모어는 이집트군이 쏜 총을 맞고 쓰러졌다. 연달아 친구를 잃은 브레송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서서히 보도사진 세계에서 멀어졌고 1974년 공식 은퇴를 선언했다. 전성기에 시 쓰기를 중단하고 새 삶을 개척했던 랭보처럼 브레송도 사진을 떠나 회화 세계로 건너갔다. 그는 그림을 그리며 남은 생을 조용히 보냈다.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시모어 몫까지 대신하듯 브레송은 1세기 가까이 살았다.

수십 년 동안 '라이카 카메라'와 함께 전 세계 온갖 삶을 바라본 브레송. 그 안에서 마법 같은 순간을 포획한 브레송은 결국 이렇게 고백했다. "평생 결정적 순간을 찍으려 발버둥쳤으나 삶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찰나에서 영원을 본 브레송의 눈은 2004년 영영 감겼다. 전 세계 언론은 '시대의 눈'이 사라졌다며 애도했다.

오늘날 우리는 모두 포토그래퍼다. 언제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지금 이 순간'을 찍는다. 길가에 핀 꽃을 찍고, 길고양이를 찍고,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찍고, 이사 가기 전 텅 빈 집을 찍고, 새근새근 잠든 아기를 찍고, 하루라도 젊은 부모님을 찍는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이 사진들을 다시 볼 때 우리는 브레송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조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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