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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 (수)

이슈 '위안부 문제' 끝나지 않은 전쟁

대일 외침, 2차 피해에 은둔까지…생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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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 퇴촌면에 위치한 나눔의 집에 거주중인 이옥선(92) 할머니. 권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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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학교 못 다닌 게 한이 됐제. 해방 이후 야학에서 글을 배웠어. 그 이후로 책 읽는 게 제일 좋아서 여기서 내 별명이 ‘독서 박사’예요. (이옥선 할머니)

지난 7일 오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에 위치한 ‘나눔의 집’에 이옥선(92) 할머니가 반듯하게 앉아있었다. 연일 폭염이 이어지던 날, 할머니의 건강이 염려돼 “괜찮으시냐”고 물으니 “여기 있으니 더울 때 더운 줄 아나, 추울 때 추운 줄 아나. 이게 행복이다”며 웃어보였다. 할머니는 지난해 한차례 수술 뒤 퇴원했는데, 그 이후 차츰 건강을 회복했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댕기는덴(다니는 데는) 문제 없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더위나 추위를 무릅쓰고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정기 수요집회에도 종종 참석한다.

침대 한켠에 놓여있는 책, 2G 휴대전화, 전국 노래자랑 재방송이 나오는 TV, 벽면 한켠에 붙어있는 추억이 담긴 사진들. 나눔에 집에 있는 할머니의 방은 여느 할머니들의 방과 다르지 않았다. 이 할머니는 “요즘은 눈이 잘 안 보여서 책을 예전만큼 못 읽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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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할머니 방 한켠에 붙어있는 사진들과 탁자 위에 놓여있는 성모상. 권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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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년 전 세례를 받은 천주교 신자인 할머니는 매주 주일미사를 거르지 않는다. 방 한켠에 놓여있는 성모상과 매달 발행되는 『매일미사』8월호가 이를 보여주는 듯했다. 할머니는 혹시 미사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까 염려해, 사람이 많이 모이는 대축일 미사 등은 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다. 돈도 벌고 공부도 시켜준다는 말에 15살에 식모살이를 갔고, 거기에서 일본군에 끌려갔다. 1942년부터 해방 때까지 중국 연길에서 3년간 위안부 피해를 당했다. 해방 이후에도 할머니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 할머니는 “부모ㆍ형제가 다 한국에 있는데 나라고 왜 고향에 안 오고 싶었겠냐. 너무나 오고 싶었다. 그런데 이마에 위안부 ‘딱지’를 붙이고 어떻게 한국에 올 수 있었겠냐”며 울먹였다.

이 할머니가 한국에 들어온 건 해방 55년 뒤인 2000년이다. 한국으로 귀국해서는 계속 나눔의 집에 거주 중이다. 한국에 와서 가족들을 수소문했으나 이미 모두 사망한 뒤였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입을 오물거린다. “일본군들한테 맞아서 이빨이 다 빠져서 이렇게 됐어요. 이거 때문에 밤에 잠도 잘 못 자요. 고칠 수 있는 약이 있다는데, 몸이 건강하지 못하니 그 약도 못 쓴다고 해요.”



스무 분 남은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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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위안부’ 할머니 이제 20명.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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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 집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 할머니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현재 나눔의 집에는 6명의 할머니가 거주하고 있다. 그 중 외부 활동을 하거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할머니는 사실상 이옥선 할머니와 동명이인인 또 다른 이옥선(89) 할머니 뿐이다. 강일출(91)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있어 최근의 일은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나머지 3명의 할머니는 집중 치료실에 누워있어 거동이 불편한 상태다.

지난 4일 서울에 거주하던 한 할머니가 별세했다. 올해 들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세상을 떠난 것은 이번이 다섯 번째다. 정부에 공식 등록된 위안부 피해 생존자 240명 중 220명이 세상을 떠났다. 생존자 20명 모두 85세 이상의 고령이며 절반은 90세가 넘었고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다.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6명의 할머니를 제외한 14명의 할머니는 서울을 비롯해 각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불교에서 설립한 나눔의 집에서는 스님과 봉사자들이 1년에 한 두 번 ‘재가 방문’을 한다. 소정의 용돈과 쌀 20kg, 휴지 등 생필품을 전달하고 할머니들의 건강 상태 등을 살핀다. 현재 14명의 할머니 중 나눔의 집 측에서 재가 방문을 통해 근황을 살피고 있는 할머니들은 10여 명 정도다.



피해자에 가혹했던 한국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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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 추모공원에 할머니들의 아픔을 표현한 작품 뒤로 글귀가 적힌 노란 나비가 보이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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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할머니를 방문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나눔의 집 관계자는 “할머니들이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나눔의 집 관계자들의 방문을 반갑게 맞이하는 할머니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할머니들도 다수라고 한다. 나눔의 집 측에서 주소를 수소문해서 찾아가 면담을 하려다 거절당한 경우도 부지기수다. 여성가족부에 피해자로 등록은 했지만, ‘위안부’ 피해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에 할머니 본인이 부담을 가지거나 가족들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안신권 나눔의 집 소장은 “그동안 피해자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거나 2차 가해를 해 오던 한국 사회에서 피해자로 증언하기 부담스러워하는 분들이 계신다”고 밝혔다.

서울의 한 요양원에 입원해있다가 별세한 A 할머니의 가족은 나눔의 집 측의 방문을 거절했다. 주위에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데, 요양원에 나눔의 집 관계자들이 방문하면 혹시 피해 사실이 드러날까 우려됐기 때문이다. 안 소장은 “가족이 거부해 어렵게 한두 번 할머니와 면담한 게 전부”라고 말했다.

할머니가 사망할 때까지 가족들이 모르고 있었던 경우도 있다. 전북 고창에 거주하던 B 할머니는 생전 자녀 한 명에게만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털어놨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나머지 자녀들은 할머니가 별세한 후 장례식 때가 되어서야 얘기를 전해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안 소장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으면 안타까운 마음에 가보고 싶다가도 ‘가족끼리 조용히 하고 싶다’는 말에 마음을 접곤 한다”고 털어놨다.

할머니 본인이 외부인과의 접촉을 어려워하기도 한다. 현재 경북 포항에 거주하는 C 할머니는 재가 방문을 하는 여성 스님과 남성인 안 소장이 함께 방문하자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고 한다. 안 소장은 “할머니께서 나중에 스님에게 ‘왜 남자와 같이 왔냐’며 당황스러워했다고 한다”며 “트라우마 등으로 아직까지 외부인과 함께 있는 것을 불편해하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권유진 기자 kwen.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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