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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 (토)

광복 74주년…충북 유일의 생존 광복군 오상근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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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탈출 2년 만에 광복군 입대…임정요인·가족 경호

“후손들 명예 위한 혜택 필요…죽기 전 통일 보는 게 소원”

뉴스1

충북 유일의 생존 애국지사 오상근 옹.©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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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뉴스1) 김정수 기자 = 74주년 광복절인 15일. 충북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독립군 오상근 옹(96·진천군 진천읍)은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남다른 감회에 젖는다.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운 광복군 동지들이 생각나서다.

충북 진천 토박이인 오 옹은 1942년 일본군에 붙잡혀 강제 징집됐다.

중국 계림의 일본 이라시 부대에서 훈련을 받으며 전쟁터로 나갈 날만 강요받았다.

그는 천황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일본군 신분으로 전쟁에서 죽는 것이 모욕이라 생각하고 부대에 있던 조선인 동료 4명과 함께 탈출했다.

오 옹은 “일본군이 중국의 한 마을에서 가축이나 귀금속 등을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환멸을 느껴 중경(임시정부 소재지)으로 가기 위해 중국 계림 300리 후방에서 탈출했다”고 말했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겼고 중국인들에게 붙잡혀 일본군 간첩이라는 오해를 받아 4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하기도 했다.

탈출 2년 만에 오 옹은 임시정부를 찾아가 광복군에 입대했다.

그는 임시정부에 걸려 있는 태극기와 손을 내밀며 맞아주던 김구 선생의 모습까지 세월이 지난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고 회상했다.

오 옹은 광복군에 들어가 총사령부 경위대에서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을 경호했다.

그는 “소속은 경위대 2중대 5분대였다”며 “경호업무와 함께 인근 운동장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진격작전을 준비했었다”고 당시생활을 설명했다

입대 1년 뒤 조국이 광복됐다는 소식을 듣고 그와 광복군들은 눈물을 흘렸다.

광복 후 3∼4개월이 지나 부대와 함께 인천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 옹은 진천에서 25년간 공무원 생활을 한 후 성균관 유도회 진천군 지부장, 진천신협 이사장으로 일했다.

1992∼2000년 10월까지 광복회 충북도지부장을 맡아 기념사업을 하는데도 열정을 쏟았다.

광복군 활동을 인정받아 1963년과 199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오 옹은 “광복회는 독립유공자나 선열들의 유훈을 받들어 민족정기를 선양하는 곳”이라며 “선배들의 공훈을 세상에 알리는 사업을 했다”고 말했다.

오 옹은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제와 싸우다 죽은 유공자들의 후손들이 어려운 생활에 처해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심정도 드러냈다.

그는 “연금도 중요하지만 남아있는 후손들이 명예를 지키고 살아가도록 실질적인 혜택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도내에서 광복군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가 됐다.

오 옹은 74년 전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쉬워 이제는 통일된 조국을 보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 됐다.
5229@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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