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를 1년 조금 넘게 앞둔 미국에서는 150여 년 전 벌어졌던 흑인 노예제에 대해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이른바 '레퍼레이션(Reparation)'이 최근 들어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 여럿이 내년 대선에서 흑인 표를 얻기 위한 목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이슈화에 앞장서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국 내 저명한 흑인 경제석학이 과거 흑인 노예제 배상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놔 화제가 되고 있다. 글렌 라우리 브라운대 경제학과 교수(71)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흑인 학생이 대학 입학 시 혜택을 주는 미국의 '소수집단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에도 반대하는 입장이다.
라우리 교수는 33세 나이에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하버드대 종신교수직을 받은 인물이다. 응용미시이론 분야 권위자인 그는 사회갈등과 평등문제를 주로 연구해왔다. 최근 한국경제학회 주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그를 만나 인기영합 정책이 야기할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해 들어봤다.
라우리 교수는 과거 흑인 노예제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와 관련해 "최소 수조 달러의 비용이 발생하는 거대 공익사업을, 그것도 150년 전 일을 이제 와서 보상한다는 명목으로 국가를 둘로 쪼개서는 안 된다"며 "미국에는 가난한 흑인 못지않게 가난한 백인이 많다. 과거 제도가 잘못됐던 건 사실이지만, 흑인과 백인을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요한 건 몇십 년이 걸리더라도 '아프리칸-아메리칸(미국 흑인)'이란 개념 자체가 사라지게 하는 것인데, 레퍼레이션 같은 정책은 이를 더 어렵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진정한 복지정책이란 집단 간 사회적 갈등을 유발해서는 안 되고, 보다 보편적일 필요가 있다는 게 라우리 교수의 신념이다. 그래서 그는 소수집단 우대정책 폐지를 주장한다. 라우리 교수는 "아이비리그(미국 동북부 8개 명문 사립대) 중 하나인 브라운대에는 매년 3만명 넘는 우수한 학생들이 지원해 그중 약 1800명만이 합격의 영광을 누린다"며 "하지만 특혜전형으로 입학한 흑인 학생들은 다른 학생에 비해 느끼는 자부심의 크기가 작다. 자부심을 느낄 기회조차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공학·물리학·유기화학 전공학과에서는 흑인을 찾아보기 힘들며, 내 수업에 참여하는 흑인 학생 성적도 일반전형 학생과 비교했을 때 분명히 차이가 나타난다"면서 "브라운대보다 못한 대학에서는 흑인 학생과 일반 학생들의 학습능력 차이가 더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그는 "필요에 따라 한시적으로 시행하는 복지정책이라면 모르겠지만, 소수집단 우대정책은 시행한 지 이미 50년 넘게 흘렀다"며 "이는 미국 내에서 흑인을 '경쟁력이 떨어지지만 포용해야 할 집단'으로 인식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처럼 낙인찍힌 사회적 취약집단에서는 집단 내 비난, 따돌림, 갈등 등을 우려해 본인 재능을 드러내지 않고 썩혀 버리는 구성원이 나타난다"며 "혹은 유능한 구성원이 집단을 벗어나 남겨진 이들의 평판이 도리어 추락하는 부작용을 겪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라우리 교수는 경제학자지만 과거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 38세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교육부 차관에 지명(이후 개인 사정으로 임명 철회)됐을 정도로 교육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러려면 교사 수준을 높이는 교육개혁을 통해 대도시 공립학교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과거 휴스턴에서 진행됐던 교육실험 결과에 따르면 학습시간과 학교에 머무르는 시간을 늘리고,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에 대한 교내 과외수업을 실시하고, 시험을 자주 보고, 교복을 입히는 등 학교 문화를 바꿨을 때 학생들의 학업능력이 월등히 올라간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라우리 교수는 4차 산업혁명 과정에서 일어나는 산업 간 갈등에 대해서는 "기존 산업이 신산업의 등장을 막는다면 우린 지금보다 훨씬 가난하게 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기술과 산업이 진보함에 따라 원래 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피해를 보는 건 불가피한 일"이라며 "창조적 파괴에 따른 고통에 대한 보상을 해주는 건 필요하지만, 기술·산업의 진보는 전통산업 종사자이면서 동시에 소비자이기도 한 그들에게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라우리 교수는 불필요하게 긴 감옥살이(Incarceration)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에 대해서도 견해를 공유했다. 그는 "투옥은 잠재적 범죄자에게 경고 신호를 줌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하지만, 전체적인 비중은 줄여 나갈 필요가 있다"며 "예를 들어 미국 여러 주에서는 중범죄를 세 차례 저지르면 종신형을 살게 하는데, 연구에 따르면 범죄율은 50대가 넘어가면서부터 급격히 떨어진다. 50대 이상 수감자들이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큰 비용을 들여 교도소에 가둘 필요가 없는 셈"이라고 주장했다.
[이유섭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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