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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 : JTBC 뉴스룸 (20:00~21:20) / 진행 : 손석희
[앵커]
말씀드린대로 바로 단재 선생의 며느리인 이덕남 여사를 화상으로 연결하겠습니다. 이덕남 여사님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우선 앞에 리포트로 저희들이 간단히 전해드리기는 했는데 시아버지인 단재 선생의 집 터를 도로 찾기 위해서 소송을 시작하신 배경을 직접 좀 잠깐이나마 듣고 싶습니다.
Q. 삼청동 '단재 선생 집터' 반환소송…배경은?
[이덕남/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 안녕하세요. 제가 신채호 선생 며느리입니다. 저희 아버님 집이 삼청동 우리 아버님은 2통 4호라고 하셨어요, 9번지가. 그런데 이제 요새 네이버상 보니까 신번지가 삼청동 2-1이더라고요. 그래서 신번지를 찾았고 또 처음에, 맨처음에 토지 조사를 할 때 당시가 1912년인데. 12년 11월 18일인가 그런 그 날짜에 삼청동을 사정을 했습니다. 했는데 그때는 삼청동이 157필지가 전부였었어요. 그런데 그 가운데 1, 2번지는 나라 국이 딱 쓰여 있어요. 지금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때 당시에 그러니까 소유주가 없었다는 얘기죠. 다른 사람들은 다 소유주가 있는데 우리 아버님 땅이나 1, 2번지는 소유주가 없었고 나라가 수탈해 간 것이죠, 뭐. 그랬고.
저희 아버님은 다 아시다시피 1910년 4월에 이것을 광고를 내고 바로 망명하셨거든요. 그래가지고 1936년 2월 21일날 서거를 하시는데 우리 아버님이 서거하고 2년 이따가 일본 사람이 말하자면 경로, 땅을 취득하는 데는 경로가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경로도 없이 일본 사람이 보전등기를 했어요. 그랬고 그리고 이제 그 뒤에는 바로 조선 사람인 모양인데요. 최이란이라는 사람이 또 그것을 받았더라고요. 그래서 1940…]
[앵커]
대략 어떤 내용인지는 알겠습니다. 사실 그동안에 친일파들의 땅들은 많이 되찾아서 돌려준 것이 있습니다. 법원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명확한 어떤 근거자료를 가지고 왔으니까 이것이 할 말이 없다라고 해서 돌려준 예가 많이 있는데, 단재 신채호 선생 같은 경우에 이 땅의 경우에는 바로 그런 것이 별로 없어서 못 찾은 것인데 조금 아까 저희들이 잠깐 화면으로 보여드렸습니다만 광고도 내신 것이 있고 여러 가지 증거를 가지고 이번에 소송을 하시게 돼서 그 내용은 저희들이 이제 어차피 결과가 나올 테니까 좀 볼 텐데요.
80년대부터 저희가 얘기를 들었더니 중국을 오가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또 20년 가까이 단재 선생의 국적 회복을 위해서 많은 애를 쓰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 선생님은 인생의 많은 시간을 단재 선생의 명예를 회복하고 알리는 데 상당 시간을 보내셨는데 정작 결혼하실 때는 시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셨다면서요?
Q. 단재 국적 회복 등 노력…인연 맺게 된 계기는?
[이덕남/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 몰랐습니다. 그냥 보통으로 있는 아버지인 줄 알았었는데요. 결혼하고 애를 둘을 낳고 그렇게 하고 우리 남편이 다 잘 아시겠지만 의열단 선언문 그것이 펴지고 운동권의 교과서마냥 읽혀졌거든요. 그래서 이제 박 정권에서 이제 우리를 빨갱이라고 다시 이제 몰았죠. 그래서 많이 쫓겨다니고 또 서러움도 많이 받았고요, 그 당시에.]
[앵커]
그렇군요.
[이덕남/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 그렇게 하고 그것이 이제 해금이 되니까 북쪽에서 우리 아버님 유고가 펴졌는데 그것을 이제 일본 도쿄대학에 있는 교수가 수거를 해서 우리 집으로 보내줬어요. 그것을 또 받았다고 불허 문서 받았다고 또 빨갱이다 그래서 또 쫓기고.]
[앵커]
한두 가지 일이 아니겠죠.
[이덕남 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 그럼요, 그럼요.]
[앵커]
단재 선생에 대한 얘기는…
[이덕남/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 저는…]
[앵커]
이 선생님, 단재 선생에 대한 말씀은 남편으로부터도 많이 전해 들으셨을 텐데 어떤 분인 것으로 기억을 하십니까?
Q. 남편에게 들은 '아버지 신채호'는 어떤 인물?
[이덕남/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 우리 남편은 어머니 등에 업혀서 첫 돌 지나서 한국으로 와서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나니까 본인이 8살이 되니까 아버지가 처음에 눈이 멀게 생겼다고 지금 그래서 처자식을 보고 내가 눈을 감아도 감아야 된다고 그 연락이 와서 우리 시어머니하고 본인하고 둘이서 북경을 갔답니다. 가서 보니까 우리 시어머니는 간호사 출신이거든요. 가서 보니까 남편이 영양실조더래요. 그래서 이제 성야병원은 우리 아버님하고 결혼하기 이전에도 그 길을 왔다 갔다 했나 봐요. 그래서 그 성야병원에 가서 난산증에 있는 사람 그 두 사람만 주라고. 그러니까 때마침 장봉순이라는 부인이 있는데 성야병원에서는 두 분 다 포기를 했대요. 아기랑 어머니랑. 그러다 우리 어머니한테 하나만이라도 살려달라고. 그래서 우리 어머니가 이제 산파를 하셨는가 봐요. 그런데 두 분을 다 살렸대요, 아기랑 엄마랑.]
[앵커]
그렇군요. 이덕남 선생님, 이덕남 여사님 말씀 들으려면 사실은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시간을 좀 터놓고 말씀을 들어야 될 것 같은데.
[이덕남/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 그렇습니다.]
[앵커]
긴 시간을 말씀을 나눌 수 없어서 죄송하기는 하고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요즘 뭐 한·일 관계도 그렇고 다 지켜보고 계실 텐데 요즘 돌아가는 것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짤막하게 말씀하신다면.
Q. 요즘 일본의 행태 보면 어떤 생각 드나?
[이덕남/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 너무 속상해요. 너무 속상해요, 그냥. 제가 일찍 죽었어야 이 꼴을 안 보는데 어떻게 세상에, 세상에 이 땅에서 나오는 낱알로 가지고 연명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그따위 소리를 할 수가 있어요. 아베보다 더 나빠, 더 나빠 진짜로. 잘하는 것이 있으면 대통령이고 누구고 그것을 진짜 박수를 치고 찬양해 줘야 되는데 그거는 안 하고 무조건 막 헐뜯고 거기다가 헐뜯어도 우리나라 안에서만 헐뜯으면 되는데 일본놈을 대신해서 헐뜯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앵커]
알겠습니다. 어떤 생각을…
[이덕남/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 내가 기가 차서…]
[앵커]
알겠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 잘 알겠고요.
[이덕남/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 치가 떨려요, 그냥.]
[앵커]
더 말씀 듣고 싶습니다마는 시간이 좀 제한돼 있어서 이 정도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덕남 여사님 고맙습니다.
[이덕남/단재 신채호 선생 며느리 : 감사합니다.]
[앵커]
건강하시고요.
손석희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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