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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6 (일)

벤처의 산증인… "경제위기가 창업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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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은 항상 위기 속에서 싹을 틔우고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한국 경제가 위기라는 지금이 최고의 창업 기회인지도 모릅니다."

신진호(60) KTB네트워크 대표는 한국 벤처 역사의 산증인이다. 1985년 벤처투자업계에 뛰어들어 35년간 수많은 기업이 명멸(明滅)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지난달 23일 경기도 판교 본사에서 만난 신 대표는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97년 외환위기가 계기였다"고 회상했다. "대기업들이 무너지고, 혹독한 구조조정이 이어지며 직장을 잃은 엔지니어들이 줄을 이었어요. 가진 것이라곤 '기술'뿐인 이들이 창업에 뛰어들면서 한국 스타트업의 역사가 시작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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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호 KTB네트워크 대표가 지난달 경기도 판교 본사에서 벤처기업의 역사와 투자 원칙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 대표는 "투자를 고려할 때 창업자의 생각과 자세가 유연한지 등을 살핀다"고 했다. /주완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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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대표의 KTB네트워크는 한국 벤처 역사의 상징적 존재다. 이 회사의 전신은 정부가 세계은행의 컨설팅을 받아 1981년 설립한 벤처투자기관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 당시 정부가 이 회사를 설립한 계기도 1980년 2차 석유 파동으로 인한 한국 경제의 '마이너스 성장' 위기였다. 2000년 민영화된 KTB네트워크는 지금까지 2000여개 이상의 기업에 1조2742억원을 투자, 1조9700억원을 벌어들였다. 현재 운용 자산은 8735억원. '토스'를 운영하는 핀테크 기업 비바리퍼블리카(토스), '배달의 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 동남아시아 최대 차량 공유 업체인 그랩 등에 투자했다.

◇창업 성공 핵심은 '창업자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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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대표의 '투자 원칙'은 무엇일까. 신 대표는 "사업 아이디어, 기술 수준, 수익 모델 모두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리더십'"이라고 했다. "초기 기업은 처음 생각한 대로 굴러가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이 경우 외부 조언을 받아 사업을 전환하거나, 새 사람을 수혈해 경쟁력을 키우는 등의 자구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생각과 자세가 유연한 사람, 외부에서 인재를 잘 끌어올 수 있는 사람에게 투자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주장만 강조하는 외골수 창업자는 가급적 피한다"고 덧붙였다.

신 대표가 최근 관심을 갖는 분야는 의료 서비스다. 얼마 전 척추·관절 전문 병원인 나누리병원의 중국 법인에 투자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성형관광' '건강검진관광'을 올 정도로 국내 의료 서비스 수준은 세계적이지만, 한국은 의료 법인의 영리 활동을 막는 규제 때문에 의료 서비스로 수익을 내기 어렵다. 신 대표는 "한국식(式) 의료 서비스를 해외로 가져가면 성공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면서 "최근 20년간 가장 똑똑한 학생들이 주로 의대를 갔으니, 그만큼 바이오·의료 쪽에 기회가 더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투자할 기회를 놓쳐 가장 아쉬웠던 곳은 어디일까. 그는 카카오를 꼽으면서 "다른 벤처 투자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했다. 창업 당시 국내 벤처투자업계에 외면받은 카카오는 해외 자금을 받아 성장했다. 신 대표는 "카카오의 아이디어와 기술은 모두 혁신적이었지만, '돈은 어떻게 벌지?'라는 질문에 너무 매몰돼 기회를 놓쳤다"며 "그 당시를 반면교사 삼아 투자를 한 곳이 토스를 운영하는 비바리퍼블리카"라고 했다.

◇"기술 창업 많아야 생태계 강해져"

신 대표는 최근 한국 창업 생태계에 대해 걱정이 많다. 그는 "1998년 외환위기 직후에는 기술 기업 창업이 대다수였지만, 지금은 서비스, 아이디어 위주의 창업이 많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반에 등장한 벤처·스타트업은 네이버·다음·한게임과 같은 인터넷 기업이거나 반도체, 디스플레이 장비, 첨단 소재 분야의 기술 기업이 많았다. 하지만 최근엔 우아한형제들, 마켓컬리, 쿠팡 등 기존 인터넷·모바일 인프라 위에 서비스를 올린 기업들이 주목받는다.

신 대표는 "미국·중국 등 창업 강국들과 비교하면 차이가 크다"며 "미국은 투자금의 40%가 소프트웨어 기술 기업에 집중되지만, 한국은 이런 모습을 보기 어렵다"고 했다. 미국은 올해만 해도 화상회의 소프트웨어 기업 , 기업용 메신저 서비스 슬랙과 같은 기술 기업들이 상장에 성공했다. 이 기업들은 이미 미국을 넘어 전 세계 시장을 공략, 수익성과 성장세 모두 두각을 보이고 있다.

신 대표는 "기술 기업은 글로벌로 충분히 나갈 수 있지만, 서비스 기업들은 해외 진출이 어려워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한국이 다시 기술 중심 창업으로 활성화되려면 '스몰(소액) 투자, 퀵 리턴(빠른 회수)'을 선호하는 한국 특유의 벤처 투자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강동철 기자(charle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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