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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받아만 먹는 사람이 밥의 무게를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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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이용재의 필름위의만찬]

7. '리틀 포레스트'와 수제비

조선일보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직접 만들어 먹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킬 만큼 음식을 만들고 먹는 모습이 아름답게 표현된다. 하지만 식재료 밑손질과 그릇 설거지 같은 고단하고 지난한 전후 과정이 생략돼 후반으로 갈수록 현실감이 떨어지며 빛을 잃는다. /영화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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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우면 수제비가 먹고 싶어진다. 반죽을 해서 두 시간 정도 재워 놓아야 하기 때문에 눈을 치울 때 딱 알맞다.' 맞다, 밀가루 반죽은 좀 두었다가 먹어야 한다.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김태리 분)이 수제비 반죽을 재워둔다고 하자 나는 속으로 물개 박수를 쳤다. 막 저녁을 차려 먹은 뒤였지만 수제비를 끓이고 싶은 욕구마저 솟아올랐다. 영화뿐만 아니라, 음식을 다루는 모든 매체는 다 똑같다. 보든 듣든 음식을 먹고 싶은, 더 나아가 만들어 먹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리틀 포레스트'의 초반은 흥미로웠다.

그런데 밀가루 반죽을 왜 재워두어야 하는 걸까? 밀가루가 수분을 완전히 흡수하는 한편, 밀가루에 물을 더해 치대면 형성되는 단백질인 '글루텐'이 과격한 반죽 과정 이후 휴식을 가지면서 안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충분히, 그러니까 혜원의 수제비처럼 두 시간 정도 놓아둬 안정된 반죽은 한층 더 잘 어우러졌다는 느낌을 풍긴다. 표면도 매끈하고 부드러우며, 탄성을 적당히 품어서 손으로 잡아 뜯으면 적당히 저항하면서도 유연하게 딸려 올라온다. 손으로 뜯은 반죽이라고 해도 찢어지지 않고 최대한 두께를 고르게 펼 수 있으니, 지나치게 두꺼워 딱딱하거나 미끈거리는 부분이 줄어든다.

수제비뿐만 아니라, 모든 밀가루 반죽은 되든 묽든 섞는 과정을 끝낸 뒤에는 숨 돌릴 수 있는 여유를 주는 게 좋다. 빵부터 부침개, 팬케이크까지 모두 마찬가지다. 조금의 시간이 큰 차이를 자아낸다.

반죽 뜯는 재미가 쏠쏠했던 집의 수제비는 소위 '컴포트 푸드(Comfort Food,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음식)'로 마음 한편에 언제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밖의 음식 가운데에도 그만큼의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게 있다. 시계를 1995~1996년까지 되돌려야 하는 기억이다. 군입대를 앞둔 대학생이었던 나는 어느 날 조선일보에 실린 백파 홍성유 선생의 수제비집 소개 칼럼을 읽었다.

학생식당의 돈가스가 일상이었고 종종 학교 앞 단골 분식집에서 먹는 제육백반이면 너무나도 행복했던 스물한두 살이었는지라, 선생의 칼럼은 읽으면서도 나와는 거리가 먼 세계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넘기곤 했다. '어른의 맛집이라는 곳은 대체로 고급스럽고 비싸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는데 수제비라니? 이만하면 한번 가 볼 수 있는 곳이겠군. 25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서 거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아담'이라는, 수제비집 치고는 독특한 상호가 인상적이었으며 수제비 말고도 계란말이가 맛있다는 이야기 또한 잊지 않고 있다. 결국 나는 썩 관심이 없다는 친구를 설득해 생애 최초라고 할 수 있는 맛집 탐방에 나섰다.

기억이 맞는다면 현재 광화문 디타워 자리였을 것이다. 흰 페인트를 칠한 콘크리트 건물 1층에 아담 수제비가 있었다. 그전까지 수제비라면 집에서 손으로 뜯은 것만 먹어왔던지라 칼로 얇게 저며 하늘하늘하고 부드러운, 국수나 더 나아가 만두피에 가까운 반죽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역시 숙성을 잘 시켰기에 찢어지지 않으면서도 최대한 얇게 저밀 수 있었으리라. 두툼한 계란말이와 함께 수제비 한 대접을 만족스럽게 비우고는 소위 맛집 탐방의 첫걸음을 내디딘 스스로에게 뿌듯함을 느끼며 자주 찾아오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돈가스와 제육볶음의 나날에서 수제비와 계란말이의 틈을 내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군입대 후 첫 휴가를 얻어서야 다시 찾아갈 수 있었는데, 그 사이 음식점은 완연히 다른 곳이 되어 버렸다. 당시 유행했던 일본풍 꼬치구이집으로 변신을 해 간판과 인테리어를 모두 바꿨으니, 칸막이에 앉아 온갖 안주가 잔뜩 실린 메뉴에서 수제비와 계란말이를 찾아 주문해 먹는 마음은 꽤 착잡했었다. 음식점이 메뉴를 늘린다거나 분위기를 어울리지 않게 바꾼다면 영업이 잘 안 된다는 조짐 아닐까? 그리고 다시 광화문을 찾았을 때, 아담 수제비는 사라지고 없었다.

수제비를 비롯해 배추전, 시루떡 등 초장부터 반짝반짝 빛나던 '리틀 포레스트'의 음식은 뒤로 갈수록 조금씩 반짝임을 잃는다. 아니, 음식은 여전히 빛나지만 나의 공감도가 조금씩 떨어졌다고 말해야 정확하겠다. 이유가 뭘까? 무엇보다 음식이 지닌 찰나의, 입에 넣기 직전까지의 아름다움을 담는 데 골몰하느라 주변을 에워싼 지난함을 무심히 넘겼다는 인상을 받았다.

조선일보

주인공이 어린 시절 식혜와 막걸리를 어머니와 나눠 마시던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 /영화 캡처


영화를 보며 바로 직전에 내가 만들어 먹은 저녁을 비교해 보았다. 바쁜 가운데 그저 끼니를 위해 차려 원하는 음식도, 완성도도 추구하지 못했고 조리 과정을 즐기지도 못했다. 게다가 음식이 정말 간단하더라도 설거지 거리는 쌓인다. 무엇보다 끼니를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소위 시스템을 갖추고 유지하기가 지난하고 또 어렵다. '리틀 포레스트' 전반을 수놓는, 여유롭고 아름답기까지 한 음식 및 만드는 과정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다. 그렇게 여유롭게, 즐기면서 만들고 또 먹고 싶은데 그럴 여유가 현실에서는 대체로 없다.

물론 잘 알고 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니 공감이 안 되더라도 그런가 보다 넘기는 게 바람직한데, 하필 밥, 일상 식사의 문제이다 보니 감정이입을 지나치게 해버리고 말았다. 직업인(음식평론가)보다 생활인의 차원에서 더 그러했다. 메뉴를 생각하고, 주변의 식재료 구입처의 장단점을 파악해 방문 횟수 및 시간을 최소로 줄여 장을 봐오고, 부엌의 식재료 현황을 파악하고 냉장고를 관리하고, 먹고 난 다음에는 설거지를 해서 그릇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까지. 생각만으로도 지긋지긋한 일인데 영화 속에서는 그저 아름답다 보니 어느 시점에서 공감이 잘 안 되기 시작한 것이다.

만드는 이가 아닌, 받아먹기만 해서 밥상의 전후 사정은 전혀 모르는 사람의 시각 같았달까? 이런 방식으로만 음식이 빛을 낸다면 굴레처럼 일생 밥을 짓기만 해야 하는 사람이 속한 어둠은 영영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평생의 과업이 밥 짓기인 삶의 지난함을, 받아먹기만 하는 사람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용재 음식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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