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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여자친구는 나를 방으로는 절대 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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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누가 봐도 연애소설]

혼자 몰래 들어가봤더니…

조선일보

이기호·소설가


분명 그것은 사람의 그림자였다. 형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베이지색 욕실 문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가 다시 본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똑똑히 봤다. 무언가 가벼운 플라스틱 제품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도 들은 것 같았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여친은 내가 자신의 자취방에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었다. 사귄 지 벌써 일 년도 넘었는데, 자기는 내 오피스텔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와 샤워도 하면서, 자신의 방만큼은 무슨 아황산가스 보관소인 양 출입하지 못하게 막았다. 늘 번호 키를 누르는 문 앞에서 작별하는 것.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몇 번이고 열린 문틈으로 안을 훔쳐보려 했지만, 현관에 놓인 슬리퍼만 봤을 뿐, 제대로 살필 겨를도 없이 문은 닫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러다가 그 그림자와 소리를 보고 듣게 된 것이었다.

여친은 현재 시청 산하 한 문화예술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내년에 정식 공무원시험을 볼 작정이어서 지금도 퇴근 후나 주말엔 계속 인강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한데, 화요일과 목요일엔 중3짜리 학생 두 명의 수학 과외까지 하고 있다. 아니, 그럼 도대체 술은 언제 마시고, 영화는 언제 봐요? 연애 초기 내가 약간 삐친 표정으로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바쁜데, 그냥 술 마시면서 영화 보면 되잖아요? 말하자면 그렇게 그녀가 처음 내 오피스텔에 오게 되었다는 말씀. 나는 그런 그녀가 좋았다. 에둘러 말하는 법도 없었고, 열심히 사는 모습도 보기 좋았다. 충청도 옥천이 고향이라고 들었는데, 대학교 때부터 부모님한텐 아무런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금 사는 고가도로 바로 옆 허름한 오층 건물의 자취방 보증금도 그녀가 대학 4년 내내 호프집 알바해서 마련한 것이라고 들었다. 그에 비해 나는…. 일종의 '다 큰 캥거루 새끼'라고 할 수 있는데,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답시고 나이 서른이 된 지금도 매달 엄마에게서 꼬박꼬박 용돈과 오피스텔 월세를 송금받으면서 살고 있다. 부천에서 꽤 큰 삼계탕집을 운영하는 엄마는 젊은 시절 일에 매여 사느라 외아들 졸업식 한번 참석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그런 식으로 만회하려 들었다. 아들, 너무 열심히 살려고 하지 마. 엄마는 통화할 때마다 그런 말을 했는데, 그러면 나는 좀 시무룩한 기분이 되곤 했다. 하는 일이라곤 만날 영화나 보고, 시나리오 원고 쓴답시고 컴퓨터 부팅했다가, 에라 머리나 식히고 하자, 하는 마음으로 밤새 게임이나 하는 주제였으니까…. 꼭 그런 기분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정말이지 '열심히' 연애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늦게라도 오피스텔에 데리고 와서 저녁밥을 해 먹였고, 주말엔 그녀가 오기 전부터 미리 에어컨도 켜놓고 홍삼 엑기스도 준비해놓았다.

조선일보

일러스트= 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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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그녀는 왜 자신의 자취방에 필사적으로 나를 못 들어가게 막는 걸까?

어느 순간부터 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우리 사이에 뭘 감출 게 있다고?

"그냥 싫어…. 한 사람만 오면 되는데 뭘 그렇게 왔다 갔다 하려고 그래?"

"아니, 난 뭘 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궁금할 게 뭐 있다고…."

내 말이.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인데 굳이 못 들어가게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혹시 뭐 내가 알면 안 되는 비밀이라도 있는 건가? 여친이 그럴수록 내 신경은 계속 그쪽으로 곤두섰다. 그러다가 그 그림자를 엿보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어젯밤 혼자 여친의 자취방으로 조용히 찾아간 것은 그 그림자 때문이었다. 저녁 무렵 부천 엄마한테 들러 밥을 먹고 나서는데 여친한테 문자가 왔다.

―나 오늘 좀 피곤해서 네 오피스텔에서 먼저 자고 있을게. 들어와도 나 깨우지 마.

처음, 문자를 보고 나는 그러려니 했다. 어쨌든 여친의 직장에서는 내 오피스텔이 훨씬 더 가까웠으니까. 아예 피시방에 갔다가 늦게 들어가는 편이 낫겠네, 그렇게 일어서다가 퍼뜩, 다른 생각이 들었다. 여친이 내 오피스텔에 와 있으니, 나도 여친의 자취방에 가서 쉬는 게…. 부천에선 여친의 자취방이 더 가까우니까….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은 전에 없이 떨리고 긴장되었다. 정말 거기에 다른 누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게 혹시 내가 알면 안 되는 사람은 아닌지, 그걸 꼭 확인하려고 드는 내 마음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마음은 여친의 자취방 번호 키를 하나하나 누를 때까지도 가시지 않았다. 난 또 왜 이 비밀번호를 다 외우고 있는 걸까? 여친이 가르쳐준 적도 없는 이 비밀번호를….

어둠에 잠긴 여친의 자취방 현관은 괴괴했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면서 나도 모르게 숨 호흡을 크게 한 번 했다. 그러곤 작은 싱크대가 놓인 복도 겸 주방을 지나 천천히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열대야가 나흘 연속 이어진 밤답게 등 뒤에선 저절로 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방문 앞에서 또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손잡이를 돌렸다.

뭐지?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가 같이 산 흔적도 없었고, 가구도 거의 없었다.

뭐야,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못 들어오게 한 거야?

나는 조금 허탈한 기분이 되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여친의 자취방을 휘 둘러보았다. 그제야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친의 자취방엔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도 없었고, 책상도 없었다. 방 한쪽엔 얇은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고, 그 앞에 앉은뱅이책상이 놓여 있었다. 내 허리쯤 오는 서랍장이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 로션 두 개와 동전 지갑, 고지서 용지, 머리띠 같은 것이 올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고가도로 위 차가 지나다닐 때마다 부르르, 부르르, 저 혼자 떨렸다. 나는 서랍장 앞에 서서 오랫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차가 지나칠 때마다 그림자가 생기는 방, 조금 큰 트럭이라도 지나면 무언가 물건들이 툭툭 떨어지는 방…. 그것이 내 여친의 방이었다. 아울러 그제야 나는 여친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짐작해볼 수 있었는데, 나 또한 초등학교 때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려고 할 적마다 극구 오지 못하게 말렸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는 엄마가 아직 삼계탕집을 하기 전이었는데, 그때 우리 집엔 현관이라는 게 없었다. 밖에서 문을 열면 바로 방인 집. 방 안에 신문지를 깔고 거기에 신발을 놓는 집. 가장 친한 친구에겐 더더욱 보여주기 싫었던 방. 그 방이 나도 모르게 떠올랐던 것이다.

[이기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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