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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복날에도 손님보다 항의 시위 온 사람이 더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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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마지막 남은 개시장 칠성시장 마지막 복날

조선일보

전국 3대 개고기 시장 중 하나로 꼽히는 대구 칠성시장의 개고기 골목. 말복이던 지난 11일 이 골목 양쪽으로 늘어선 건강원 등 개고기 가게 앞엔 개를 가둔 철장들이 나와 있었다. 동물보호단체 회원들의 항의 시위가 열리는 날이면 상인들은 이 철장에 이불 같은 걸 덮어씌운다고 했다. /대구=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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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이 절정이던 지난 11일 오전 10시 대구 칠성시장 외곽으로 트럭 한 대가 들어왔다. 탑승객, 아니 탑승견은 하얀 털의 진돗개 한 마리. 그리고 트럭이 멈춘 가게 간판과 정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토종 개고기' '개소주'.

개소주는 개고기를 각종 한약재와 함께 넣고 삶은 원액으로 여름철 보양식으로 꼽힌다. 가게 주인이 나와 개의 목줄을 잡아끌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옆에서 구경하던 60대 남성이 "가게 뒤편에 개를 잡는 곳이 있다"고 말하자 가게 주인이 "옛날엔 가게 앞에서도 (개를) 잡았는데 요즘엔 그러다간 (내가) 잡혀갈 거다"라고 받았다. 이날은 말복이었다.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니 '보신탕' '사철탕' '건강원' 같은 단어가 어지럽게 붙어 있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개를 가둔 철장이 있는 가게들도 여럿 있었다. 상인 한 명이 "보신탕 잡수러 오셨소"라고 말을 붙이며 "여기선 즉석에서 잡아 싱싱하다"고 했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보신탕집에는 손님 몇 명이 앉아 있었다. 하나같이 수육과 탕을 시켜 놓고 술잔을 기울이는 중. 전국의 대형 개고기 시장 중 마지막으로 남은 칠성시장, 어쩌면 마지막이 될 복날을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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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날이면 동물보호단체 사람이 더 많아

"어이, 거기 아저씨요! 사진을 왜 찍습니까!"

기자가 보신탕집 앞에 진열된 개고기에 카메라를 들이대자 곧바로 고함이 터져나왔다. 10여명 상인이 기자를 둘러싸고 "사진을 찍는 목적이 뭐냐" "소속을 밝혀라"라고 소리쳤다. 취재 목적이라고 설명해도 "무슨 욕을 하려고 그러느냐"며 찍은 사진을 지우라는 이들도 있었다. 지나가던 행인 중 한 명도 스마트폰으로 철장 안에 갇힌 개 사진을 찍다가 상인들에게 제지당하고 그 자리에서 사진을 지워야 했다.

보신탕집 인심이 가장 후해진다는 복날, 상인들은 어느 때보다 예민한 상태였다. 최근 몇 년간 복날이 되면 동물보호단체 회원들이 시장에 몰려와 개고기 반대 집회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칠성시장에서 33년간 개고기 장사를 했다는 상인 김모(67)씨는 "예전에는 복날이면 개고기 사러 온 손님들이 시장 밖까지 줄을 섰는데 이제는 복날에 동물보호단체 사람이 더 많이 온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시장에서 영업 중인 보신탕집 중 점심·저녁 때 자리가 꽉 찬 곳은 한 곳도 보이지 않았다.

초복이었던 지난달 12일에도 대구동물보호연대 등 전국에서 모인 5개 단체 200여명이 시장 안에서 '개고기 반대' 플래카드를 들고 행진을 하다가 상인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작년까진 많아야 50여명 규모였는데 올해는 숫자가 확 늘었다"며 "집회가 열리면 다른 상인들까지 피해를 보기 때문에 (개고기 상인들이) 더 예민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국의 동물보호단체들이 여기까지 오는 이유는 간단하다. 대구 칠성시장은 개고기 도축부터 유통·판매까지 대규모 상권이 형성된 곳으로 경기도 성남 모란시장과 부산의 구포시장과 함께 이른바 전국 3대 개고기 시장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란시장은 작년, 구포시장은 지난 6월 개고기 도축 시설을 폐쇄하는 등 사실상 개고기 시장이 문을 닫은 상태다. 칠성시장상인연합회에 따르면 전성기였던 1980년대에는 보신탕집 등 개고기로 먹고사는 점포만 50여곳으로 시장에서 가장 큰 업종이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17곳만 영업 중이다.

여론도 상인들 편이 아니다. 한국갤럽이 지난 1일부터 5일간 1500명을 대상으로 한 '개식용 산업 시민 인식조사'를 보면 구포 개고기 시장 폐쇄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69.9%에 달했다. 구포 개고기 시장이 폐쇄된 후 유일하게 칠성시장만 남자 권영진 대구시장은 지난달 21일 "개 도축장이 도심에 있는 것은 지역 정서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며 "내년까지 칠성시장 개고기 골목을 정리하는 방안을 마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대구시청 관계자는 "현행법상 개고기 도축 시설이 불법은 아니기 때문에 법적으로 폐쇄할 근거는 없다"며 "모란시장이나 구포시장처럼 개고기 상인들과 협약을 맺고 다른 업종으로 전업을 지원하는 등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보신탕집 손님으로 온 김상엽(69)씨는 "복날이면 수십 년 동안 시장에 와서 보신탕 한 그릇 먹고 개소주 한 병씩 사서 집으로 갔는데 올해가 마지막이라니 서글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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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코리아


한 마리 팔아 만원 벌고 욕 100만원어치 먹어

"손주들이 강아지를 키워요. 보신탕집 오는 건 비밀이라예."

말복이라 보신탕을 먹으러 왔다는 권모(66)씨는 "예전엔 복날이면 아들과 함께 먹으러 왔는데 강아지 키우고 나서는 여긴 얼씬도 안 한다"며 "불란서 배우(브리지트 바르도)가 개고기 먹는 문화를 야만적이라고 한 게 엊그제 같은데 요즘엔 내가 자식들에게 야만족 소릴 듣게 생겼다"고 말했다. 개고기 식용 문화는 이렇게 일종의 세대 차이 때문에 점점 사라지는 중이기도 하다. 이날 칠성시장의 다른 가게들과 달리 영업 중인 보신탕집에 온 손님 중 20~30대 청년들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경제성장과 더불어 반려견 문화가 널리 퍼진 사회에서 자랐기 때문에 개고기 식용 문화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진 경우가 많다. 복날에 삼계탕을 먹으러 칠성시장을 찾았다는 오영훈(28)씨는 "칠성시장에 개고기 시장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며 "개고기 먹는 걸 반대하진 않는데, 위생 문제 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정서적으로 거부감이 든다"고 말했다.

시장이 줄어들면서 개고기 장사 자체가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 되고 있다. 이날 시장에서 만난 개고기 도축업자 A씨는 "복날에 개고기 가격이 가장 비싼데 그래 봐야 한 근에 4000원 정도"라며 "이 가격이 10년째 그대로"라고 말했다. A씨에 따르면 '뜬장'이라고 불리는 개 농장에서 개 한 마리 시세는 대략 10만원 안팎. 개 한 마리를 잡으면 보통 40근 정도가 나오니 한 마리를 팔 때마다 6만원을 남기지만 도축업자에게 수고비 주고 기름값 등 경비 떼고 나면 수중에 들어오는 건 1만~2만원 정도다. 한창 호황일 때는 복날 하루 수십만원씩 벌었지만 이날 A씨는 뜬장에서 데려온 개 5마리 중 2마리밖에 팔지 못했다. 복날이면 거래처에서 꼭 보신탕 한 그릇씩을 먹었지만, 이날은 "보신탕이라면 지긋지긋하다"며 오리탕을 먹으러 갔다.

"오리장수랑 개장수랑 뭐가 다른지 압니까. 오리장수나 개장수나 한 마리 팔아서 만원 버는데 오리장수는 욕을 백원어치도 안 먹어요. 그런데 우리는 욕만 100만원어치는 먹고 살 겁니다. 칠성 개시장 없어지면 나도 개장수 접고 다른 일 할랍니다."

[대구=권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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