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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만물상] 죽음의 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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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닥 시장에서 바이오 황제주로 꼽혔던 신라젠. 개발 중이던 면역 항암제의 치료 효과를 확인하지 못해 임상 3상 실험을 중단한다고 지난 2일 발표했다. 보름 만에 시가총액 2조원이 날아갔다. 신약 임상 3상 실험은 비용이 많이 들고 성공 확률은 낮아 바이오 업계에선 '죽음의 계곡'이라 부른다. 코오롱생명과학이 개발한 퇴행성 관절염 치료제도 이 과정에서 탈이 나 검찰 수사 대상에 올랐다.

▶원래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은 미국 서부의 사막 이름이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서부행 지름길을 찾던 탐험대가 사막 길을 택했다가 많은 동료를 잃은 뒤 이런 이름을 붙였다. 이후 기업이 기술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자금 부족 등으로 제품 상용화에는 실패하는 상황을 지칭하느라 미국 경영학자들이 이 이름을 차용했다. 벤처 업계에선 "죽음의 계곡과 다윈의 바다(Darwinian sea)를 건너야 살아남는다"는 말이 널리 통용된다. 다윈의 바다는 악어와 해파리 떼가 득실대는 호주 북부의 해변 이름이다. 벤처 기업이 신제품 양산에 성공한다 해도 기존 제품과 경쟁하는 탓에 수익을 못 내는 상황을 뜻한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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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선 신생 기업이 창업 3년 뒤 생존하는 비율이 39%에 불과하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꼴찌 수준이다. 미국과 유럽 주요국은 3년 생존율이 60% 가까이 된다. 신생 기업 자금 조달을 돕는 자본시장이 열악하고, 시장의 진입 장벽이 높다는 뜻이다.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서울대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삼성전자 CEO, 삼성그룹 일본 본사 대표를 역임한 IT 업계 원로이다. 윤 전 부회장이 며칠 전 일본 신문 인터뷰에서 "연구·개발과 제품 상용화 사이에는 '죽음의 계곡'이라는 높은 장벽이 있다. … 수제품(手製品) 한두 개를 만드는 데 성공하는 것과 대량생산을 하는 것은 정말 다르다"고 말했다. 정부가 일본 무역 보복 대응책으로 국산화를 말하지만 "단기간엔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내놨다.

▶'죽음의 계곡' 통과는 큰소리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치밀한 전략과 꼼꼼한 준비, 실패를 용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경제과학특보로 발탁한 '축적의 시간' 저자 서울대 공대 이정동 교수는 일본 기업의 힘을 '시행착오 경험의 조밀한 축적'에서 찾는다. 이 교수는 작금의 한국 경제 상황에 대해선 '1단 엔진은 잘 작동했지만, 2단 엔진 점화엔 실패한 로켓'에 비유하고 있다. 어떻게든 죽음의 계곡을 건너야만 한다.

[김홍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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