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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미디어 세상]역시 모든 것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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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밤 손주가 이야기를 보챕니다. 할머니는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속담을 되뇌면서도 새 이야기를 시작하는 장면이 정겹습니다. 이야기는 생업을 등한시할 만큼 중독성이 있는 것이란 말씀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경향신문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콩쥐팥쥐와 해님달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조마조마하다 깜짝 놀라는 재미에 깜깜한 겨울밤이 그리 길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이처럼 맛깔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다채로운 표현과 적절한 추임새, 생동감 있는 눈빛, 긴장을 만들도록 밀고 당기는 템포의 변화, 그리고 듣는 사람이 나중에 말할 거리를 남겨주는 여운과 같은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할머니에 버금가는 서양의 이야기꾼으로는 디즈니가 있습니다. 어릴 적 일요일 아침을 깨워주던 TV 프로그램 <디즈니랜드>의 시작은 독일의 노이슈반슈타인을 모티브로 했다는 성을 배경으로 했습니다. 동화 속 공주님이 살 만한 멋진 성 위에서 팅커벨이 마법의 지팡이를 휘두르면 반짝이는 불꽃놀이와 함께 인트로가 시작됩니다. 이어서 예의 미키마우스와 도널드덕 같은 캐릭터들이 선진국의 문물을 안방에 전해주었습니다.

냉전 시절 코카콜라를 필두로 리바이스 청바지가 소개되면 미키마우스를 따라 맥도널드가 들어온다는 아메리카니즘(Americanism)의 방향은 언제나 세계를 향했습니다. 먹거리와 패션처럼 의식주에 해당하는 원초적 욕망의 기저에는 자유와 풍요를 상징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디즈니와 같이 어딘가에서 보았지만 그 어느 곳도 아닌 이야기와 같은 ‘하이콘셉트(high-concept)’가 필요한 이유는 종교와 정치, 소득과 인종이 다른 곳에서도 꿈을 선사하고 그 대가로 지갑을 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껏 꾸준히 지속된 디즈니의 인수합병은 끊임없는 이야기의 모음과 같습니다. 픽사, 마블, 루카스필름, 21세기 폭스를 모두 합병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게 뭔데’ 싶지만 토이스토리와 어벤저스, 스타워즈와 심슨이 백설공주와 한 집안이 되었다고 설명해주면 “우와 대단한데”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신데렐라, 벨, 재스민과 같은 디즈니 프린세스가 먹여 살리던 집안에 SF의 영웅과 초인들에 장난꾸러기 악동까지 가세하여 천하무적 콘텐츠 왕국을 형성한 것입니다. 최근 디즈니는 온라인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OTT 사업까지 시작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13달러도 되지 않는 금액에 디즈니와 ESPN까지 묶어서 제공하겠다는 포부에 그만한 저작권을 보유하지 못한 기존의 방송사업자들은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급속한 미디어 환경 변화로 경영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상파 방송사들이 월화 드라마의 제작을 멈춘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상대적으로 큰 비용이 드는 드라마의 시청률이 신통치 않자 극약처방을 내린 것이라고 회자됩니다. 시청률이 잘 나온다고 하더라도 광고 효과가 큰 젊은 층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 광고주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 합니다. 한때 바보상자라고 불릴 만큼 사람들의 눈을 잡아끌던 텔레비전의 가장 강력한 이야기 상품이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한류의 원조로 불리던 <겨울연가>가 제작된 것이 2002년입니다. 그다음해 일본에서 방송되며 아시아 전역에서 폭발적인 신드롬을 만든 것이 벌써 16년 전입니다. 계속 발전하며 세를 키워오던 한국의 드라마는 <별에서 온 그대> 이후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다양한 장벽이 두꺼워지며 드라마 강국으로 불리던 우리네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하지만 넷플릭스를 통해 <킹덤>이, 유튜브를 기반으로 웹 드라마가 해외로 진출하기 시작했으니 그 결과는 두고 볼 일입니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니, 기발한 생각과 미려한 마무리가 인정받고 창작의 과실이 고르게 나눠지는 풍토가 자리 잡는다면 우리의 다음 이야기 역시 세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송길영 | 마인드 마이너 (Mind M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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