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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정인진의 청안백안 靑眼白眼]내게 ‘보수냐 진보냐’ 묻는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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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근무 시절, 칠판에 “소신 없는 판사가 되자”라고 써 놓은 일이 있었다. 방에 들어오는 사람마다 그걸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판사는 대쪽 같은 소신을 가져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소신 없는 판사가 되자니 웬 말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판사가 한번 소신이라는 똬리를 틀고 앉아 있으면 그것만큼 고약한 일이 없다. 소신이라는 이름 아래 사건을 선입관이나 편견으로 보게 될 우려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근로자가 사용자를 상대로 하는 소송이나 납세자가 세무서를 상대로 하는 소송에서 어느 일방이 늘 잘못을 저지르거나 나쁘다는 식의 인식을 갖고 판사가 사건의 결론을 낸다면 끔찍하지 않은가.

경향신문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너는 보수냐, 진보냐?” 글쎄, 그런 단선적 질문에 단순한 답을 내놓기에는 내 머리가 좀 복잡하다. 아니다, 고쳐 말해서 이 시대의 현실이 지독하게 복잡하다. 우리 사회에서 누군가의 정치적 성향을 정의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곤란하다. 우선 북쪽에 왕정의 변종에 가까운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 내 보기에는 그들이야말로 보수적이고 때로 반동적이다. 하지만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라는 말이 내포하는 복잡성과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 누가 내 견해에 찬성하겠는가. 이런 분석은 어떨까. 정치학 원론의 풀이에 따라 박정희의 이념적 성향을 보면, 그는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적 구조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정부의 개입에 의한 급진적 개혁을 꾀하였으니 진보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 견해에 동조할 사람도 많지는 않을 듯싶다. 프랑스혁명 당시 국민회의에서 자유주의를 신봉하던 세력이 정치사상사에서 좌파로 분류된다면, 선뜻 이해가 되겠는가. 이렇게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의 개념은 단순명료하지 않은 것이다.

내가 보수나 진보라는 낱말을 쓸 때, 그것은 당장의 편의를 고려한 것일 뿐이다. 어느 누구의 특정 문제에 대한 견해나 행위가 진보적인지 보수적인지를 가르는 것은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라고 규정짓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것은 그를 어느 개념의 범주에 넣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나 타인을 한쪽으로 밀어넣고, 거기에서 연역하여 자기의 말과 행동을 결정짓거나 남의 말과 행동을 평가한다면 과연 그게 옳을까. 더욱이 우리의 불행한 역사적 경험을 생각하면, 누군가를 좌파나 우파로 일컫는 일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좌파란 말은 해방정국에서의 좌우익 대립을 연상시키고, 그에 이어지는 한국전쟁이라는 처절한 비극과 이에 대한 책임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빨갱이’는 물론이고 좌파라고만 불려도 벌써 안전치 않은 것이다. 반대로 엄혹한 군사독재를 경험한 우리에게, 우파란 말은 사실 여하를 차치하고 독재에 부역하거나 동조한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진영논리란 바로 자신이든 남이든 누군가를 이런 분류방식에 따라 규정짓는 태도다. 그 태도는 무지스럽다. 한·일 경제전쟁에서 일본이 도발해 오기 전 대일청구권 문제에 관한 정부의 조치가 미숙했다는 견해에 동조하면 보수적이고, 반대하면 진보적인가. 거꾸로, 이 문제를 놓고 보수주의자라면 정부를 비난해야 하고 진보주의자라면 정부를 옹호해야 하는가. 대북관계, 경제정책, 노동문제, 교육정책 등의 모든 이슈에서 사람들은 자기의 고유한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견해를 달리한다. 이것을 보수와 진보의 틀로만 이해하거나 결정지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종북좌빨이니 강남좌파니 극우꼴통이니 하는 말을 동원하며, 그 말을 듣는 본인이 수긍하지 않을 분류법을 남에게 들씌우는 사람들의 의도는 뭘까. 특히나 강남좌파라는 말에서는, 흑인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는 백인을 ‘니거러버(‘깜둥이를 좋아하는 자’라는 뜻의 비칭)라고 부르며 빈정대던 인종주의자들의 음험한 악성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유의 악성은 오늘날 상당수 인터넷 댓글의 무지막지한 파당성에도 나타난다. 보수를 자처하는 자들의 댓글이 북한 언론매체의 말투를 닮아 있어 실소하였던 일도 있다. 그렇게 양쪽의 댓글들은 상대 진영의 흠집 내기와 욕설로 가득 차 있다. 진영논리란 그런 것이다. 스스로의 정견과 양식을 부정한다. 그 근저에는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증오심이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정작 큰 문제는 다른 데 있을지도 모른다. 보수주의자 됨의 뜻도 모를 것 같은 자들이 보수적 견해라면서 무식한 이기주의를 드러내는 모습이 그렇다. 자기희생이나 공적 책임감 따위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상스러움이 보수의 탈을 쓰고 있는 것이다. 삐뚤어진 냉소주의와 증오심에 빠져 있거나 싸가지 없고 부도덕한 자가 진보를 자처하는 모습도 한심하긴 매일반이다. 병역을 면한 이유가 아무리 보아도 수상쩍은 자가 보수라며 설치고,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우습게 아는 자가 진보라고 나서는 현실을 보라.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지지층의 결집이나 자기 진영의 이해관계다. 그리하여 허튼 말만 제멋대로 온 세상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다.

세상엔 회색지대의 지성과 양심이 있음을 기억하라. 정치적 성향에서의 연역적 사고를 버리자. 인간과 사회와 문명은 단순하지 않다. 생긴 대로 보라. 덧붙이건대, 어느 쪽이든 이념적 증오는 반지성적이다. 그리고 악이다. 증오는 개인과 사회를 모두 소진케 한다. 그러기에는 오늘 우리의 처지가 너무 절박하지 않은가.

정인진 |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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