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8 (토)

베테랑 어민의 빛나는 '촉', 장기 미제 위기 '한강 훼손 시신' 해결했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수색 난항 경찰, 사흘 만에 행주어촌계에 ‘지원 요청’
행주 어민 33명 중 11명, 민간해양구조대로 활동
어민들, 하루 만에 ‘사건 해결 결정적 단서’ 오른팔 발견
"빠른 유속 타고 가다 가장자리 수풀에 걸렸을 것…예상 적중"

"한강에서 건져 올린 시신만 몇 구인데, 이번에도 강 가장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샅샅이 뒤졌죠."

‘한강 훼손 시신’ 사건 수사에서 피해자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팔과 머리 등 나머지 시신을 발견한 데는 경기 고양시 행주동 일대 ‘베테랑 어민들’의 뛰어난 ‘한강 수색 능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19일 확인됐다.

지난 12일 머리와 팔다리가 없는 ‘몸통 시신’만 발견돼 경찰이 피해자 신원조차 확인 못하는 상황에서 수색에 나선 어민들은 수색 하루 만인 16일엔 지문(指紋)을 확인할 수 있는 오른팔을, 17일엔 치아를 확인할 수 있는 머리까지 발견했다. 어민들의 공(功)으로 피해자의 신원이 확인되자 30대 모텔 종업원은 경찰에 자수했다. 어민들은 19일에도 추가 시신을 발견하기 위해, 마곡철교 남단부터 김포대교까지 12㎞를 경찰과 함께 수색하고 있다.

조선일보

어민이 어선을 몰고 경찰과 함께 강변 수색을 벌이고 있는 모습. /어민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훼손 시신’ 신원 확인 못한 경찰, 수색 사흘 만에 어민들에 ‘SOS’
경찰에 따르면 지난 12일 오전 9시 15분쯤 경기 고양시 한강 마곡철교 부근에서 목과 팔다리가 없는 ‘몸통 시신’이 발견됐다. 하지만 경찰은 몸통만으론 지문이나 치아 등을 통해 피해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경찰은 시신의 다른 부위를 찾기 위해 대대적인 수색에 나섰다. 관할서인 경기 고양경찰서와 경기북부지방경찰청은 전담 수사팀 43명을 꾸렸고, 수색 전담팀에 드론과 경찰견까지 투입했다.

하지만 수색 사흘째까지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결국 경찰은 지난 15일 한강 하구 일대를 꿰뚫고 있는 행주 어촌계에 도움을 요청했다. 행주 어민 33명 중 11명이 지난 4월 ‘민간해양구조대’로 위촉된 참이었다. 한강 주변 지리에 밝은 지역 어민 등으로 구성된 민간해양구조대는 2012년 수상구조법 개정 이후부터 정식 출범해 경찰의 수색과 구조를 지원하고 있다.

18년째 뱃일을 하는 어민 박찬수(60)씨는 "조업이 한창일 때라 정신없이 바쁘지만, 평소 경찰 도움도 많이 받았고, 한강 지리와 특성을 잘 아는 우리가 적임자라고 생각해 봉사하는 마음으로 나섰다"며 "강에서 시신을 발견하는 건 이곳 어민들에게 익숙한 일"이라고 말했다.
◇어민 수색 이틀째 ‘오른쪽 팔’ 발견...수사 급물살
비가 내리던 15일 오전 9시 어민 박씨는 배를 몰고 경찰과 한 조를 이뤄 한강에 나섰다. 박씨는 "경험상 유기된 시신은 보통 배가 지나간 파장과 물살에 떠밀려 강 가장자리 쪽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것을 알고 처음부터 강변을 돌았다"며 "비가 와 물이 많을 때였고, 바람도 행주 쪽으로 불어 4~5시간 동안 김포~행주 남단을 유심히 봤다"고 말했다.

어민들이 수색에 동참한 지 이틀째인 16일 오전 10시 48분쯤 행주대교 남단 500m 부근 강변을 지나던 박씨의 어선이 돌연 멈춰 섰다. 잡초가 무성한 강가에 버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발견한 것이다.

"몸통이 알몸 상태로 발견돼 시신 위주로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길쭉한 검은색 봉지가 보여 느낌이 ‘싸’했습니다." 박씨는 "경찰이 (봉지를) 만져보더니 ‘팔이에요’라고 하더라. 그래서 배 엔진을 끄고 매듭을 풀러 확인하니 오른쪽 팔이었다"고 말했다.

오른쪽 팔에 있는 지문을 통해 피해자 신원을 확인하자 수사는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피해자의 동선을 파악한 경찰은 피의자 A(39)씨를 용의 선상에 올렸다. 수사망이 좁혀오자 A씨는 17일 새벽 서울 종로경찰서를 찾아 자수했다. 경찰 관계자는 "팔이 나오지 않았다면 신원 확인과 피의자 검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라며 "다행히 지문이 확보돼 피해자가 방문한 모텔을 특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17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한강하구에서 '몸통 시신' 일부로 추정되는 머리 부분을 발견한 어민 보트. /어민 제공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튿날도 추가 발견…"유속 느린 강변쪽으로 밀려 났을 것…예상 적중"
다음날 어민 임정욱(64)씨와 정운도(50)씨는 어선으로는 진입하기 힘든 뭍을 수색하기 위해 고무 구명보트를 구해 수색을 재개했다. 수색한 지 1시간 40여 분이 지난 오전 10시 45분, 방화대교 남단에서 어선이 들어가기 힘든 낮은 강변 풀숲을 뒤지던 임씨가 검정 비닐봉지를 들어 올렸다. ‘머리’였다.

임씨는 "강변에 버려진 쓰레기봉투를 다 확인하던 중 만져보니 동그랗고 냄새가 나는 봉지가 있어 보트에 싣고 과학수사대가 있는 경찰 천막으로 이동해 확인했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어선을 끌고 시신 수색에 나선 어민 심화식(65)씨는 "이곳에서 어로 생활을 오래한 어민들은 강변북로 쪽보다 올림픽대로 방면 유속이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마곡대교 남단에 버린 시신은 올림픽대로 쪽으로 빠른 유속을 타고 이동하다가 유속이 느려지는 곳에 닿았을 거라 여기고 경찰과 상의해서 수색을 벌였다"고 말했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어민들의 빛나는 ‘촉’(觸·감각)이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단초가 된 셈이다. 경찰은 시신 수색에 나선 어민들의 공로를 인정해 표창 수여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 구로구의 한 모텔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A씨는 지난 8일 오전 투숙객으로 온 B(32)씨를 둔기로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해 한강에 유기한 혐의(살인 및 사체손괴, 사체유기)로 구속됐다.

[최지희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