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4.28 (일)

정말 ‘폭염 사망자’가 0명일까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레21] 질병관리본부 1년 전 약속한 ‘사회적 부검’ 이뤄지지 않아

한겨레2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소외된 이웃들이 폭염에도 무방비로 노출돼 있음을 여러 사례로 보여주면서 각종 통계와 정부 정책을 점검했다. 이를 통해 실태 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사회적 피해자’들의 현실을 고발했다.” 제1224호 표지이야기 ‘누가 폭염으로 숨지는가’의 내용을 잘 요약한 이 문장은 민주언론시민연합이 2018년 8월 발표한 ‘이달의 좋은 보도’ 선정 이유였다.

심장질환 사망 원인은?



지난해 사상 최악의 폭염으로 전국에서 48명(질병관리본부 폭염감시체계 기준)이 목숨을 잃었다. <한겨레21>이 들여다본 2018년 폭염은 야외 노동자, 이주노동자, 에너지 빈곤층, 노인 등 취약계층에게 더욱 혹독했다. 이렇게 불평등한 피해를 파악해야 할 감시체계는 미흡했다. <한겨레21>은 각계각층 목소리를 빌려 ‘폭염 정책’ 수립에 참고할 수 있는 ‘폭염백서’를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질병관리본부(이하 질본)는 2012년 온열질환 사망자가 14명에 이르자 폭염 피해 백서를 발간했지만 일회성에 그쳤다. 1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폭염 대책은 얼마나 정비됐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수십 명의 인명 피해를 겪고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8월9일 낮 12시30분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제2공학관(302동) 직원 휴게실에서 청소노동자 ㄱ(67)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ㄱ씨는 오전에 작업을 마치고 쉬던 중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9일은 낮 최고기온이 34.6℃를 기록했고 일주일째 폭염주의보와 폭염경보가 번갈아 발효되고 있었다. 하지만 건물 계단과 강의실 사이 한 평 남짓한 가건물로 마련된 휴게 공간에는 에어컨 같은 냉방기기는 없었다. 곰팡이 냄새가 나도 환기조차 할 수 없는 공간에서 ㄱ씨는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은 ㄱ씨가 심장질환을 앓고 있었다는 사실에 근거해 ‘병사’로 결론지었다. 여름의 높은 기온은 탈수를 동반해 그로 인한 심혈관질환과 신장질환 발생에 높은 관련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지만, 경찰은 ‘심장질환’을 원인으로 판단한 것이다. 심장질환을 유발했을 환경적 요인(폭염)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응급실을 거치지 않은 ㄱ씨는 질본이 파악하는 폭염 통계에 포함되지 않았다. 질본이 매일 발표하는 온열질환 통계 서울 지역 사망자 수가 8월15일 현재까지 ‘0’명인 이유다.

이렇듯 질본의 온열질환 감시체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보건 당국은 전국 509개 의료기관의 응급실을 통해서만 온열질환자를 파악해 보고하면서 “전국 응급실에서 수집한 온열질환자 진료 현황으로 전수감시가 아닌 표본감시 체계 운영 결과”라고만 밝힌다. 현장에서 사망했거나 응급실을 거치지 않으면 여전히 감시체계 사각지대에 놓인다.

더 큰 문제는 현재 운영 중인 감시체계도 빈틈이 많다는 사실이다. 응급실에 수많은 환자가 몰리면 의사가 ‘열사병’ 정도로 증상이 심하지 않으면 온열질환으로 분류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더 정확한 온열질환자 파악을 위해선 응급실 의료진에게 교육과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한겨레21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일률적으로 보내는 긴급재난 메시지만



“지난해 여름엔 매일같이 온열질환자들이 응급실을 찾았는데 거의 수백 명의 환자를 봤다. 젊은 사람은 딱 2명 있었다. 건설현장 노동자와 공장 노동자였다. 그 외에는 모두 노인이었는데 특히 주거환경이 열악한 어르신들이었다.”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의사는 지난해 여름 자신이 본 환자들을 떠올렸다. 폭염이 사회 약자를 노린다는 것은 명백했다. 질본이 지난 5월 발표한 ‘2018 폭염으로 인한 온열질환 신고현황 연보’를 보면 온열질환으로 사망한 48명이 모두 열사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파악됐는데 이 중 34명(70.8%)이 65살 이상 고령층이었다. 고령층 중에서도 22명(45.8%)이 80대 이상이어서, 고령층에게 폭염은 더욱 치명적이었다.

고령·취약계층을 위한 폭염 대책은 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 주거환경이나 생활, 행동양식이 일반 인구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긴급재난 문자메시지를 통한 폭염특보 전달이다. 서울연구원이 지난해 펴낸 ‘서울시 폭염 대응력 향상방안’ 보고서를 보면 긴급재난 문자로 폭염을 인식하는 비율이 50대 이상 일반 시민은 89.3%에 이르렀지만, 취약계층(기초생활수급권자 중 65살 이상이거나 장애가 있는 경우)은 57.7%에 불과했다. 긴급재난 문자를 보내기에 앞서 휴대전화를 갖고 있는지, 해당 안내 문자를 읽을 수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전기요금을 낮춰주기에 앞서 냉방기기가 있는지, 무더위 쉼터를 늘리기에 앞서 실제 이용하고 있는지를 분석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폭염과 온열질환 피해자들의 생활환경과 행동양식, 사회경제적 지위를 분석하기 위해 질본은 2018년 폭염 피해를 백서로 기록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한겨레21> 보도가 나간 직후였다.

2012년에는 온열질환 피해자의 성별과 나이, 발생 장소 등 기본 정보만 분석했지만 이번엔 피해자들의 월평균 소득과 학력, 가족관계, 냉방기기 보유 여부 등 세부적 특징을 꼼꼼하게 분석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온열질환 사망자와 인구·사회학적 특성이 비슷하면서도 피해를 입지 않은 대조군까지 분석하겠다는 포부도 드러내 <한겨레21>이 주문했던 ‘사회적 부검’을 실시할 듯 보였다.

연말께 2018년 폭염 분석 가능



하지만 이 계획은 1년이 지난 지금까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질본의 연구용역을 받은 연구진은 2018년 온열질환 사망자와 응급실 데이터를 뒤늦게 받아 최근에야 분석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질본이 목표로 했던 ‘사회적 부검’은 벽에 부딪혔는데, 행정안전부에서 온열질환 병력과 연락처 등은 개인정보에 해당해 공유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질본의 의뢰로 2018년 폭염 피해 백서를 작성 중인 황승식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한겨레21> 전화 인터뷰에서 “지난해 정부가 폭염 대책으로 실시했던 내용이 폭염 피해를 줄이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 평가도 해야 하는데 여러 법·제도적인 문제로 진행이 잘 안 되는 상황”이라며 “먼저 제공받은 데이터를 중심으로 간단하게 연구용역 보고서를 작성한 뒤 연말께 2018년 폭염의 건강 영향을 분석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한겨레21>이 후원제를 시작합니다. 정의와 진실을 지지하는 방법, <한겨레21>의 미래에 투자해주세요.
[▶후원 하기]
[▶정기구독 신청]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