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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김현우의 내 인생의 책]③햄버거에 대한 명상 - 장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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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하고 파격적인

경향신문

그 시절 많은 시간을 대형서점에서 배회했습니다. 종로와 교보, 영풍과 을지, 신촌의 홍익, 집 가까운 천호동에 새로 생긴 교민…. 서점에 들를 때마다 지나치지 못했던 코너가 바로 ‘시집’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1980년대는 문화의 시대이자 팝의 시대,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시(詩)의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김정환(지울 수 없는 노래)과 박노해(노동의 새벽) 같은 운동권 시인들. 박남철(지상의 인간)과 황지우(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의 파격과 실험. 첫 시집을 유고 시집으로 낸 기형도(입속의 검은 잎)의 안타까운 허무. 하재봉(안개와 불)이 그려낸 신화적 상상력과 시운동 동인들의 신선함. 최근 세계적 권위의 그리핀 시문학상을 수상한 김혜순(어느 별의 지옥)이 그때 풍겼던 괴이한 죽음의 향기…. 1980년대는 진정, 축복받은 시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절, 시에 심취했던 청년들을 가장 전율케 했던 시집을 단 한 권만 꼽는다면? 주저함 없이 단언합니다. 당연히 장정일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 그 시절 ‘조금은 삐딱했던’ 청춘들이라면 많이들 동의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중졸 학력과 소년원 경력의 프로필은 특이합니다. 하지만 더욱 빛나는 것은 엄청난 독서량에서 나온 ‘백과사전적’ 지식과 순탄치 않았을 인생이 빚어낸 기발하고 대담하고 파격적인 시어들. 패기 찬 상상력은 그를 ‘시의 80년대’를 상징하는 대표 시인으로 기억하게 합니다.

이 글을 쓰던 중, 그가 물경 28년 만에 새 시집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급한 마음에 인터넷 구매를 클릭하려다 순간 멈췄습니다. 내일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서점을 찾을 예정입니다. 시인 장정일을, 만나기 위해, 다시 그곳에서.

김현우 | 영화제작자·페퍼민트앤컴퍼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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