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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영화 리뷰] 1994년, 성수대교 무너지던 날… 여중생 은희의 시선이 멈춘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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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먼지만큼 작은 떨림을 통해 집채만 한 파동을 그린다. 오는 29일 개봉하는 영화 '벌새'(감독 김보라)는 길고 간혹 지루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면 극장까지 찾아온 수고로움을 잊을 작품이다. 올해 베를린영화제 '게네라치온 14+' 부문의 국제심사위원 대상과 시애틀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로스앤젤레스 아시안퍼시픽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는 등 전 세계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25개 상을 석권한 화제작이자 문제작. 언뜻 보면 1994년 당시 중학생이었던 은희(박지후)의 사적인 얘기에 집중하는 듯 보이지만, 영화는 138분 러닝타임을 넘기면서 기어코 야심 차게 이야기의 지평을 넓히고 만다.

조선일보

'벌새'는 1994년 여중생 은희의 눈길이 닿는 곳을 비춘다. 작고 평범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끝내 카메라는 우리 사회의 거대한 환부를 들추고 만다.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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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경험에서 시대의 거대한 파고(波高)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를, 한 여자 아이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가부장제의 그늘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선 작가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영화는 이보다 한층 더 잠잠하게, 희뿌연 새벽녘의 낮은 안개처럼 말을 걸어온다.

은희의 일상은 1990년대 대한민국에서 보통의 삶을 살았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고 보았을 법한 지극히 '한국적인 풍경'으로 채워져 있다. 서울 개포동에서 떡집을 하는 은희의 부모님은 밤낮없이 일하며 돈 벌기 바쁘고, 공부 잘하는 오빠는 유독 특별 대접을 받지만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남자 친구도 만나고 노래방도 가보지만 은희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건 한문 학원 선생님(김새벽)뿐. 가끔 오빠에게 얻어맞고, 학교에서 체벌을 견디면서도 집과 학교 근처만을 오가던 은희가 버스를 타고 멀리 나가게 되는 건 귀밑에 작은 혹이 돋아나면서부터다. 멀리 병원을 다니면서 은희는 더 많은 것과 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그해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무너진다.

영화를 연출한 김보라 감독은 뚝심 있고 용감하게 카메라를 움직인다. 무참하고 거대한 사건 앞에 관객이 고개를 돌릴 수 없도록,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에 귀 막아버릴 수 없도록. 빠르게 성장하는 사회 밑바닥에 스며드는 알 수 없는 불안과 균열, 돋아나는 혹과도 같은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병(病)이 하나 둘 쌓이다 결국 다리가 우지끈 끊어져 버릴 때, 보던 이들의 명치 끝도 뻐근해진다.

1994년의 정서를 담아내기 위해 감독은 당시 소품을 구하려 오래 발품을 팔았고, 주인공이 거주하는 곳으로 나오는 대치동 은마아파트의 빈집을 찾기 위해 헤맸다. 김 감독은 "지극히 한국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외국 관객들이 크게 공감해줘서 고맙고 기뻤다. '내 얘기 같다'며 우는 분들도 많았다"고 했다. 영화 제목인 벌새는 몸무게가 30g밖에 안 된다는 아주 작은 새. 1초에 90번씩 날갯짓을 한다. 이 작지만 부단하게 날개를 움직이는 새가 은희일 수도 있고, 영화를 보는 우리일 수도 있다. 거대한 그림도, 출발은 결국 점이다.



[송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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